프로 씨름이 1990년대 중후반 들어 몰락한 이유는 다른 프로 스포츠들의 성장과 젊은 세대의 무관심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는
이만기로 대표할 수 있는 비교적 체격이 작은 선수들이, 현란한 기술과 몸놀림으로 큰 덩치를 넘어뜨리는 화려한 씨름이 점점 쇠퇴하고, 덩치로 승부하는 빅맨들의 게임이 씨름의 주류가 되면서, 재미가 없어졌다는 게 거론된다. 일본의
스모의 몰락과 비슷한 현상이다.
프로 씨름 초기에는 체중 무제한인 백두급 선수라고 해도 120~130kg 정도가 최고였으나, 강호동의 은퇴 이후 160kg에 육박하던
김정필이 체격과 힘으로 버티는 수비 씨름으로 일관한 끝에 정상에 오르면서 150kg를 넘는 초중량 선수들이 우후죽순 등장했다. 이후 이 거구의 선수들이 버티는 수비씨름만 일삼다보니 지루함에 관객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물론 김칠규 등 기술 씨름의 명맥을 잇는 테크니션들이 김정필을 꺽으면서 열렬한 환호를 받기도 했지만, 점점 대형화하는 선수들과는 반대로 경기 내용은 단조로워졌다. 심지어 200kg이 넘는 씨름 선수가 등장하기도 했으니 말 다한 셈. 이런 빅맨들 중에서도 박광덕이 람바다를 추는 등 쇼맨십을 가진 선수들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큰 덩치를 화려한 콤보 기술로 내다꽂던 이만기, 고경철, 손상주 등의 기술 씨름과 함께, 이준희, 이봉걸이 3李 시대를 이루며 각자 개성을 뽐내던 시기에서 샅바 잡고 주야장천 밀고 당기기만 하다가 끝나는
[30] 지루한 씨름이 대세가 되니, 당연히 인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
여기서 결정적으로 카운터를 날린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백승일과
이태현의 천하장사 결승전이다. 이 경기는 씨름 몰락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백승일은 큰 덩치에도 화려한 기술과 유연성을 보인데다, 끼와 말재주도 좋아 수비씨름으로 일관하던 김정필 부류의 선수들과 차별화 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같은 청구씨름단 소속이자 수퍼루키였던 이태현과의 결승전에서 서로 샅바잡고 빙빙돌다 시간만 끌어대면서 연장전 포함 7차전 끝에 계체로 승부가 결정되는 볼썽 사나운 모습을 연출했던 것. 문제는 이태현이 같은 팀 소속이라 백승일의 체중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승부를 피하다 계체로 가면 자신이 이긴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이다. 계속 승부를 내지 못하고 연장전이 되자 그래도 승부를 보려고 공격을 하는 백승일과 달리, 아예 대놓고 시간끄는 자세로 뒤로 물러서는 이태현은 관중들의 야유가 빗발쳤는데도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 다 씨름의 미래라 불리던 10대 선수가 승리에 눈이 멀어 저울 달기로 승부를 끌고가는 추한 모습을 생방송으로 보던 사람들은 씨름에 대놓고 혐오감을 느꼈고, 이 경기를 기점으로 씨름의 시청률과 관심도 대 폭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태현은 이후 백승일이 선점한 수퍼루키의 위치를 자신이 차지하고 씨름계의 최강자로 올라섰지만, 이미 등을 돌린 관객들은 채널을 돌리고 경기장에 발을 끊기 시작한 후였다.
이처럼 씨름계를 대표할만한 초대형 스타의 명맥이 끊긴 것은 씨름의 쇠퇴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잘생긴 외모에 화려한 테크닉을 구사하는 모래판의 황제
이만기,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 인간 기중기
이봉걸 이들이 경쟁하던 86~88년 사이는 그야말로 씨름의 황금시대로, 천하장사대회 평균 시청률이 3,40%를 유지했으며, 천하장사대회 결승전에는 길거리가 한산할 지경이었다. 이들의 은퇴 후에도 선수생활 은퇴를 예고하며 황혼기에 접어든 이만기를 꺾으며 새롭게 떠오른 당돌하고 건방진 악동
강호동의 존재로 이만기 은퇴에 따른 충격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초, 새로운 간판으로 떠올랐던 강호동의 갑작스러운 은퇴 후에는, 위에 서술한 것처럼 '슈퍼두꺼비'
김정필을 위시한 비만형 선수들의 수비 씨름이 흥미를 떨어뜨렸고, 한때 '제2의 강호동'으로 불린
백승일, '모래판의 황태자'
이태현, '봉팔이'
신봉민, '들소'
김경수, '모래판의 귀공자'
황규연, '골리앗'
김영현 등이 1990년대 중후반 씨름판을 이끌어 갔지만, 이만기와 강호동이 호령하던 시절의 카리스마와 스타성에는 한 참 미치지 못했다. 이후 여러 유망주들이 등장했지만, 대부분 소리 소문 없이 묻혔다.
1990년대 내내 씨름의 인기가 점점 떨어지면서, 대회 스폰서가 떨어져 나갔다. 1996년까지만 해도 현대 코끼리 씨름단, LG증권 황소 씨름단, 세경진흥 사자 씨름단
[31], 부산조흥금고 호랑이씨름단, 일양약품 원비씨름단, 청구 청룡씨름단
[32], 한보철강 멧돼지씨름단
[33], 진로 두꺼비씨름단
[34] 등 8개에 이르렀던 프로 씨름단은 1997년 들어
한보 사태의 여파로 한보 씨름단을 시작으로
1997년 외환 위기크리까지 겹쳐 세경진흥, 조흥금고, 청구, 일양약품 씨름단이 줄줄이 해체되고
[35] 1999년 봄 진로 씨름단마저 끝내 해체되고 삼익파이낸스 백마씨름단과 강원태백건설 곰씨름단이 창단되어 4개 팀으로 겨우 구색을 맞추었지만 이 팀들도 모기업이 자금사정이 좋지 못했던지라 오래 존속하지 못했다. 결국 2000년에 신창건설 코뿔소씨름단이 삼익파이낸스 씨름단을, 지한정보통신 씨름단이 태백건설 씨름단을 인수했지만 지한 씨름단마저 오래 존속하지 못해 프로 씨름은 2004년까지 단 3팀만으로 운영되었다. 또한 지상파 TV 중계가 크게 줄어드는 와중에, 씨름연맹은 대책은커녕 미봉책조차 내놓지 않은 채 그저 사태를 강 건너 불구경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천하장사 출신인
최홍만이 이종격투기로 전향하여
K-1에서 성공하고, 뒤따라
이태현,
김영현 등도 씨름판을 떠나 이종격투기로 옮긴 일은 씨름판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런 문제를 지적하면서, 어떻게든 씨름 인기를 살려보겠다고 고군분투하는
이만기를 씨름연맹은 시끄럽다고
영구제명해버렸다. 이것은 씨름연맹의 가장 큰
삽질로 평가된다.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로, 씨름이 이 정도까지 몰락하게 된 배경으로는, 씨름에 큰 위기가 닥쳤는데도 무사안일에 가까운 태도로 일관하여 프로 씨름을 망하게 만들다시피 한 한국씨름연맹이 있다.
대한빙상경기연맹,
한국e스포츠협회,
한국성우협회 등 일 못한다고 욕먹는 협회야 많긴 하지만 그래도 판 자체를 부숴버릴 수준으로 일을 개판으로 하지는 않는데, 아예 리그 자체를 망하게 할 정도로 일을 전혀 하지 않은 협회는 한국 역사상 한국씨름연맹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한때는 10팀이 넘어가던 프로팀은 최홍만이 속해있던 LG투자증권이 2004년을 마지막으로 해체되고 신창건설 씨름단마저 2006년 초에 해체되어 사실상 막을 내렸고
[36], 유일하게 남아 있던
현대중공업도 계열사인
현대삼호중공업에 운영권을 넘기고 실업팀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2017년 유일한 기업팀이었던 현대삼호중공업 씨름단도 해체되고 영암군청
[37] 씨름단으로 재창단되었다. 현재는 지자체 소속의 실업팀 위주로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종격투기로 옮긴 전직 씨름 선수는 최홍만을 제외하면 고전을 면치 못하고 대부분 조기 은퇴하거나 씨름계로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