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한스크는 1795년 영국의 사업가 찰스 개스코인이 러시아 정부의 의뢰를 받아 흑해 함대를 위한 탄약 및 대포 공장을 설립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 공장은 루한 강과 빌키브카 강이 합류하는 도네츠크 분지에 지어졌다. 루한스크라는 이름도 도시를 흐르는 루한 강에서 유래하였다. 그 공장은
나폴레옹 전쟁과
크림 전쟁 동안 크게 확장되었다. 1880년까지 공장은 철도로 다른 주요 도시 및 아조프해와 연결된 대규모 산업 단지였다. 1896년 여름, 독일의 산업가 구스타프 하르트만은 루한스크에 기관차 제작 회사를 설립했으며, 이 회사는 러시아 제국에서 생산되는 기관차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루한스크는
러시아 내전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적군과 백군의 피튀기는 혈전이 벌어졌으며 결국 1920년 1월 적군이 점령하였다. 1차대전과 러시아 내전이 끝난 후 볼셰비키들은 파괴된 도시를 복원하기 시작했고 1935년 11월 5일, 도시 이름이 보로실로프그라드로 바꾸었다. 1926년에서 1939년 사이에 인구가 72,000명에서 212,000명으로 증가했으며, 시골에서 도시로 우크라이나인들이 유입되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피해 도시로 온 노동자들이었다. 보로실로프그라드는 나치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이 소련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는 데 실패한 후 제2차 세계 대전의 최전선 도시가 되었다. 1942년 7월, 독일은 이 지역에 군대를 집중시키고 소련군을 볼가와 북캅카스로 후퇴시켰다. 독일은 1942년 7월 14일 보로실로프그라드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후 1943년 2월 14일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보로실로프그라드는 재건되고 인구는 증가되었다. 이 때 보로실로프그라드의 재건을 돕기 위해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유입되었고, 우크라이나인이 48.3%로 감소하고 러시아인은 47.1%로 증가하였고 소련 말기에는 우크라이나인에는 41.8%로 더 감소하였다. 1991년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자 인구 추세는 역전되어서 우크라이나인은 50%가 되고 러시아인은 47%가 되었다.
2014년 4월,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분리주의자들은 루한스크에 수도를 둔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 뒤 주정부 청사를 점령하였다. 이에 2014년 8월, 우크라이나 정부군은 반군이 장악한 루한스크를 완전히 포위했다. 그러나
바그너 그룹과 러시아군이 개입해 우크라이나군을 몰아내었고, 루한스크주의 임시 행정부는
세베로도네츠크로 옮겨졌다. 그 후 병합 투표를 통해
루한스크를 정식으로 러시아 연방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물론 국제 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