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원(訓鍊院)은조선 시대에무관의 시취, 무예와 병서의 강습 등을 관장하던정3품 관서이다.
조선태조(太祖) 1년(1392년) 7월에 왕조 교체와 함께 새로운 관제가 반포될 때 처음 설치되었던 훈련관(訓鍊觀)이 시초로[1] 고려 왕조에서 중시한 십학(十學)의 하나인 무학(武學)을 토대로 출범하였다.[2] 훈련관에서는 무예를 훈련하고 병서와 전진(戰陣)을 교습시키는 일을 맡았다.[1]
그뒤 태조 3년(1394년)에 중군군후소(中軍軍候所)를 흡수하고,태종(太宗) 5년(1405년)에는병조(兵曹)에 속한 아문이 되었다. 그러다가세조(世祖) 12년(1466년)에 처음 훈련원으로 개칭, 경관직 정3품 아문으로 정비되었다.[1]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훈련원은오군영이 창설되면서 군사 훈련 기관으로써의 기능이 약화되었으며,인조(仁祖) 대에능마아청(能麽兒廳)이 설립되면서 병학(군사학) 교육 기관으로써의 역할도 능마아청에 내주고 말았다. 그 결과 훈련원은 주로 무과나 취재(取才)·시재를 담당하는 부서가 되었고, 예전만큼의 위상을 누리지는 못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정약용은 훈련원이 그저 무과나 주관하는 부서라며 관서 명칭을 훈련원에서 '무거원'(武擧院)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영조 40년(1764년)에 영조의 지시로 건물을 수리하고, 능마아청을 훈련원에 통합하였다.정조(正祖) 재위 후반인1796년에 훈련원의 건물을 보수하고, 이듬해에 훈련원절목을 토대로 훈련원을 새롭게 정비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이 절목에서 훈련원을 금군의 훈련장으로 명시하고, 병조가 담당한 능마아청 소속 낭청에 대한 근무 평정을 훈련원에 넘겨주어 능마아청이 훈련원의 하위 기관임을 분명히 하였다.
대한제국융희 1년(1901년)에한일신협약 체결에 따라대한제국 군대 해산과 함께 훈련원도 폐지되었다.[3]
훈련원의 임무는 크게 시취(試取)와 연무(演武) 두 가지였다.
조선 초기 훈련관의 관원은
이었다. 이 가운데 사직과 부사직을 제외하고는 다른 관직과 겸직하였다.[1]
《경국대전》에 따르면
그밖에 습독관(習讀官)이 30인 있었는데, 훈련원 녹관(祿官), 권지(權知)와 함께 《병요》(兵要),무경칠서(武經七書),통감(通鑑), 《장감박의》(將鑑博議),진법,병장설을 습독하고 사어(射御)를 익혔다.[3]
훈련원의 수장인 도정은당상관(堂上官)의 지위에 있었는데, 도정 바로 아래의 정3품당하관(堂下官) 관직인 정(正, 훈련원정)을 거치면 당상관에 오를 수 있었다. 정3품 당하관에서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하려면 국왕의 재가가 있어야 했다. 이러한 재가를 거치지 않고도 특정 관직(보직)을 역임하면 당상관에 오를 수 있었는데, 무관직 가운데는 훈련원정이 그 유일한 특정 관직이었다.
훈련원 청사는서울특별시중구 을지로6가 17-2 현대시티아웃렛 동대문점 자리에 있었다. 군사 훈련을 위해 주변에 넓은 부지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훈련원 폐지 이후에는 운동회와 같은 체육 행사 공간으로 자주 활용되었고,1907년에는대한제국 군대 해산,1919년에는고종 장례식 등이 거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