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버는중세 시기라인강 중류 남측에 세워졌다. 하노버라는 이름은 높은 강둑을 뜻하는Honovere에서 온 것이다. 하노버는 작은 어촌에서 시작하여 13세기 무렵 규모가 큰 도시로 성장하였다. 하노버의 성장은 라인 강을 이용한 무역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한자 동맹의 활동과 함께 하노버는 독일 북서부의하르츠 산맥에서부터 한자 동맹의 중심 도시였던브레멘에 이르기까지독일 전역의 무역로를 연계하는 거점으로서 성장하였다.
14세기 도시에 3개의성문을 갖춘성곽과 함께성당이 세워졌다. 독일의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하노버는 하르츠 산맥 북부의철과은의 운송 거점이 되었다.
이후 영국의 군주는윌리엄 4세에 이르기까지 하노버 선제후를 겸하였다. 그러나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자살리카 법의 규정때문에 여성이 선거후의 지위를 이을 수 없었다. 그러나 빅토리아의 부군이었던작센공 앨버트는 니더작센 지역의 영주 지위를 유지하였다. 영국과 하노버 왕국은 1714년부터 1837년까지 동군연합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816년에서 1837년까지 하노버 왕국을 실제 통치한 군주는부왕캠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공이었다.
1803년 7월 5일아르틀렌부르크 협정에 의해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3만여 프랑스군이 하노버로 진군하였고 하노버의 군대는 해산되었다. 당시 하노버 선제후국의 선제후이던조지 3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많은 수의 군인들이 영국으로 이민하여독일 근위군단을 구성하였다. 이후 독일 근위군단은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와 싸운 유일한 독일 군대가 되었다. 이들은 후일워털루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814년빈 회의는하노버 선제후국의 재건을 결의하였고 하노버 선제후국은하노버 왕국으로 승격되어 부활한다. 하노버는 다시 하노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하노버 왕국의 영토는라인강 동안까지 확장되었다.
1937년 국가위원회 위원이었던 하노버 시장이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에 가입하였다. 이후나치 독일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유대인에 대한 인종 탄압이 있었다. 1938년 10월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484명이 폴란드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폴란드는 입국을 거부하였고 이들은 난민이 되어 폴란드적십자에 수용되었다가 유럽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추방된 유대인 가운데에는헤르셀 그린스펀도 있었다. 헤르셀 그린스펀은 하노버에서 추방당한 뒤 파리로 가 독일 외교관이었던에른스트 폼 라스를 암살하게 된다. 폼 라스가 암살되자 나치는 보복을 명분으로수정의 밤 사건을 일으켜 전국의 유대인에 대해린치를 가한다. 이 사건의 여파로 하노버의시나고그가 파괴되었다.
1941년 나치 독일은 유대인을게토로 격리하였다. 하노버의 유대인 2,400명이리가로 추방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1938년 하노버에는 4,800여명의 유대인이 있었으나 1945년 4월 10일미군이 진군하였을 때 남아있는 유대인의 수는 1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하노버 오페라 광장에 유대인 박해 추모비가 있다.
하노버에는 도시의 중요성에 걸맞은 규모의 종합대학이 있으며, 하노버 대학(Universität Hannover)로 칭하여 오다가 2008년부터 수학자 라이프니츠의 이름을 붙여, Gottfried Wilhelm Leibniz Universität Hannover 로 공식명을 사용하고 있다.
또, 왕궁으로 쓰이던 건물을 대학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주변에 과거 인공적으로 조성된 아름다운 공원들이 많아 아름다운 캠퍼스로 보자면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 조용히 자연을 즐기며 학업을 진행하기에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