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까지는독일의 군주였으나프로이센의빌헬름 1세에게 빼앗겼다. 준식민지로 영향력을 행사하던세르비아인들과 갈등을 빚다가1914년에는세르비아를 침공,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항상 백발의 노장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그는 68년의 재위 기간 동안 전제 군주로서의 책임을 훌륭하게 완수하였으며, 종이에 여유분이 없으면 공문서조차도 이면지로 사용할 정도로 근면 검소하였다.
1848년 혁명으로 큰아버지인페르디난트 1세가 퇴위함에 따라 18세의 젊은 나이에 즉위했다.1849년 10월 러시아 군대의 도움을 받아 헝가리 혁명 세력을 진압하고 곧 북부 이탈리아의 영토를 회복할 때까지 전략적으로, 이전의 칙령 헌법을 보장하였다. 그러다가 1851년 안정을 되찾은 요제프 1세는 헌법을 파기하고 새로운 절대주의를 도입하였다.
이 새로운 국가 절대주의를 후세 사람들은 이를 주도한 내무대신 바흐(bach, A, 1813~1893)의 이름을 따서 바흐 절대주의라고 부르게 되었다.바흐 절대주의는 혁명 이전의메테르니히 절대주의보다도 더 일관성이 있었고, 더 체계적이었다. 수적으로 더 막강해진 군대에 의존했으며 도시 지역의 정규 경찰과 비밀 경찰 외에도 시골 지역에서 새로 생긴 기동경찰이 이 절대 권력을 떠받쳐 주고 있었다. 또한 로마 가톨릭 교회와 국가간에도 밀착하여 국가 절대주의에 커다란 힘이 되었다. 1855년 황제와교황 비오 9세 간의정교협약으로 국가의 가톨릭교회에 대한 간섭은 완전히 사라지고, 교회의 모든 일은 주교가 전담하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육과 개인의 가정사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국가와 로마 가톨리교회와의 유착은 향후 오스트리아와 체코의 가톨릭 교회에 적지 않은 문제들을 야기하였다.[1]
그리고 이 영향으로 의회가 탄생함에 따라 오스트리아의 전제정치도 종결되고 헝가리의언드라시 줄러를 초대 수상으로 지명한 뒤1867년6월 8일 헝가리의 사도왕[2]에 올라 이중 국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성립했다.
1866년에는 자신의 지지파들을 중심으로 결집한빌헬름 1세에게독일 연방의 왕이라는 직함을 양보하였다. 사실상 이름 뿐인독일의 군주였으나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 이후에도 한동안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독일의 군주의 칭호를 유지하고 있었다. 1867년 국제박람회를 빈에서 개최하고 국정에 전념하다가1889년1월 29일 외아들인 황태자 루돌프와 애인 마리 베체라의 자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조카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추정상속자로 책봉하였으나 그도 1914년사라예보 사건으로 그의 부인과 함께 암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