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미란다어는 미란다두도루 현에서 지역 공용어로 인정되어 사용된다. 21910년까지는군주제(국호도 "포르투갈 왕국")였다.1911년 국민 투표로 공화정이 인정되었다. 31999년까지는이스쿠두를 사용했다.
포르투갈 공화국(포르투갈어:República Portuguesa 헤푸블리카 포르투게자[*],영어:Portuguese Republic) 또는포르투갈(포르투갈어:Portugal,IPA: [puɾtuˈɣaɫ],문화어: 뽀르뚜갈)은남유럽에 위치한 나라로,이베리아반도의 서부와 북대서양 상의 군도들을 그 영토로 한다.[5] 국토의 총 면적은 92,090 km2[6] 로, 동쪽과 북쪽은스페인, 서쪽과 남쪽은 대서양을 맞댄 대륙부와 대서양 상의 두 자치지역인아소르스 제도와마데이라 제도로 구성되어 있다. 포르투갈은 유럽 대륙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나라이다. 이름은 제2의 도시포르투의 라틴어 이름 "포르투스 칼레"(라틴어:Portus Cale)에서 유래하였다.[7]
오늘날 포르투갈의 국경 안에 포함된 지역은 선사 시대부터 계속 사람이 거주해 왔다.갈라이키족과루시타니족 같은켈트인들은 후에로마 공화정에 통합되었고, 이후수에비족과서고트족 같은게르만족이 정착하였다. 8세기부터는무어인이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하기 시작한다. 기독교도의헤콩키스타 도중에 초기엔갈리시아 왕국, 후엔레온 왕국의 일부로포르투칼레 백국(포르투갈어:Condado de Portucale 혹은 Condado Portucalense)이 성립된다. 1139년포르투갈 왕국의 성립과 1143년 독립 승인, 1249년 국경의 확립을 통해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민족 국가로 거듭난다.[8][9]
"포르투갈"이라는 이름은서기 930년과 950년 사이에 등장하였고,1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더 빈번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카스티야의 페르난도 1세가 1067년 아들가르시아 2세에게 영토를 주면서 공식적으로 포르투갈이라고 명명하였다.[14]수에비족의 통치하에 있던5세기에 이미히다티우스(라틴어:Hydatius)는 수에비족의 왕레키아르(라틴어:Rechiar)가 도피한 장소를 "포르투칼레"(라틴어:Portucale)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Rechiarius ad locum qui Portucale appellatur, profugus regi Theudorico captivus adducitur: quo in custodiam redacto, caeteris qui de priore certamine superfuerant, tradentibus se Suevis, aliquantis nihilominus interfectis, regnum destructum et finitum est Suevorum"[15]("포르투칼레라고 불리는 곳으로 도망간 레키아르는 포로가 되어테오도릭에게로 끌려갔다. 감시 속에 붙잡혀 있었고, 비록 몇몇은 죽었지만 이전 전투에서 살아남은 나머지 수에비족은 항복하였다. 이렇게 수에비 왕국은 파괴되어 종식되었다.")
오늘날빌라노바드가이아인 "칼레"(라틴어:Cale)는 이미고트족 시기에 "포르투칼레"(라틴어:Portucale)로 알려졌다. 841년 작성된 문서에서는 갑작스럽게 "포르투갈"(portugalense) 주에 관해 처음으로 언급되었다.아스투리아스의 알폰소 2세는루고의주교의 통치권을 확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Totius galleciae, seu Portugalensi Provintiae summun suscipiat Praesulatum."[16] ("그가 갈리시아 주와 포르투갈 주의 모든 최고 행정부의 자리에 임할 것.")
캄펠루 성 바르톨로메오 교회의 기증서
하지만 "포르투갈"이 오늘날의포르투에 정박해서 정착한그리스에서 온 우두머리고이델 글라스(아일랜드어:Goídel Glas,라틴어:Gathelus,포르투갈어:Catelo 카텔루[*])가 지은 "포르토가텔루"(Portogatelo)란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17]문장의 요소로써, 포르투갈의 이름은 초대왕인아폰수 엔리케스가 1129년캄펠루(포르투갈어:Campelo)에 위치한 성 바르톨로메오 교회(포르투갈어:Igreja de São Bartolomeu de Campelo)에 보낸 기증서에 처음으로 등장한다.[14]
포르투갈 독립 훨씬 이전부터,갈리시아 왕국과포르투칼레를 통치하던 귀족들에 의해, 독립에 준하는 자치권 확대를 꾀한 시도들이 여러 번 있어왔다. 레온 왕국의 지배에 대한 지방 귀족들의 독립 분위기를 일소하기 위해,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는 당시 "포르투칼레 땅"을 포함하고 있던 갈리시아 백작령의 통치권을부르고뉴의 하이문두(포르투갈어:Raimundo de Borgonha) 백작에게 양도하였다.무어인에 대한 하이문두의 여러 차례의 군사적 실패 이후, 1096년 알폰소 6세는 하이문두의 사촌동 엔히크 백작에게 갈리시아 백작령 남쪽 땅의 통치권을 양도하며,포르투칼레 백작령이 세워졌다. 동 엔히크 백작의 통치 아래, 포르투칼레 백작령은 무어인들과의 전쟁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군사 정책은 물론, 가장 활발한 독립정책을 펼쳤다. 동 엔히크 백작이 죽은 뒤, 아들동 아폰수 엔히크스가 권좌에 올랐고, 포르투갈은산타렝,리스본,팔멜라,에보라 등 주요 거점을 무어인들로부터 정복하는 한편, 1143년사모라 조약을 통해 독립에 서명하였다.[24]
포르투갈은1480년대부터 거의 100년 동안 '황금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1578년모로코 정벌에 나선 젊은 왕동 세바스티앙과 상당수 포르투갈 귀족이알카세르키비르 전투에서 대패해 사망하면서 혼란에 빠졌고, 뒤를 이어 즉위한추기경왕 엔히크도 2년 뒤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포르투갈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하였고, 1580년스페인 국왕이 포르투갈의 왕을 겸하는동군 연합(同君聯合)이 형성돼 스페인의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필리피나 왕가"의 첫 왕인 "필리프 1세"로 즉위하였다.[28] 독립된 외교권을 상실하고 스페인과 묶인 포르투갈은네덜란드와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인도양 독점무역이 깨지며 큰 퇴보를 겪게 된다.[29]
이러한 스페인의 지배는 1640년 12월 1일 포르투갈 귀족들이쿠데타를 일으켜 종식시켰고,동 주앙 4세가 포르투갈의 왕으로 즉위하였다.[29]
1640년 12월 1일포르투갈 독립운동쿠데타 이후, 곧스페인과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 전쟁은 1668년까지 가서야리스본 조약을 통해 스페인이 포르투갈의 왕정 복고와 독립을 인정하며 끝나게 된다.[30]
16세기 말부터 18세기 전반기까지 브라질에서 금과 귀금속 등 광물이 발견되며 광산개발은 호황을 맞이했고, 이를 통해동 주앙 5세 시기 포르투갈의 궁정은 유럽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호화로운 궁정 중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축적된 부는 주로 수입품을 지불하는데 사용되었는데, 특히 포르투갈 왕국 내에 직물 산업이 거의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직물을잉글랜드로부터 수입을 하였다. 이로 인해 대부분이 잉글랜드로 빠져나가게 된다. 포르투갈의 대외 무역은 와인 산업에 기반하였고,동 주제 통치기인 1750년에서 1777년 사이 재상을 지낸폼발 후작은 이러한 상황을 전환하기 위해 중상주의적 개혁 등의 노력을 통해 왕국의 경제발전을 주도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리스본과알가르브를 폐허로 만든 1755년 11월 1일의대지진이 발생하였다.[31]
19세기의 남은 기간 동안 포르투갈은내전과9월 혁명,마리아다폰트 혁명,파툴레이아 전쟁 등 반복되는 반란과 무력 봉기와 같은 거대한 사회정치적 혼란기를 겪었으며, 1852년헌장에추가 법령이 더해지면서 겨우 정치적 안정과재생 기간 중 주를 이룬폰트스 페레이라 드 멜루를 앞세운 진흥 정책의 시작이 가능해졌다.[33] 19세기 말엽, 포르투갈의 식민지 야욕은 영국과 충돌했고, 이는 1890년 영국의최후통첩의 원인이 되었다.[34] 영국의 요구에 대한 굴복과 점점 더 흔해져가는 경제 문제와 논란으로 인해 왕실에 대한 불신은 점점 더 커져갔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08년 2월 1일 국왕동 카를루스와 왕세자동 루이스 필리프가 암살된다.마누엘 2세가 이끈 왕실은 2년을 더 유지하지만, 1910년 10월 5일에 일어난1910년 10월 5일 혁명을 계기로 공화국이 수립되며 폐지된다.[35]
1910년 10월 5일공화국이 수립된 지 머지않아, 젊은 왕마누엘 2세는 잉글랜드로 떠나게 된다.[36] 이 후 수년간 노동자 투쟁, 소요사태 ,봉기, 정치인 암살, 재정위기 등 정치적 혼란을 겪었고, 이러한 문제들은제1차 세계 대전에 참가하면서 더 깊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6년군대가 권력을 쥐게된다. 군사 정권은 1928년재무부 장관으로코임브라 대학교의 교수였던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를 임명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살라자르는 1932년각료회의 의장으로 임명된다.[37]
살라자르는 재정을 회복하는 동시에, 단일 정당과 국영 노조를 가진 국가조합주의적 권위주의 정권이스타두 노부 (신국가체제)를 수립하였고, 최소 1945년까지파시즘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38] 이후 1968년 병으로 인해 권력에서 멀어지며,마르셀루 카에타누가 살라자르의 뒤를 이었다.[39]
살라자르 정권의해외 주탈식민지화에 대한 거부는식민지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고, 1961년포르투갈령 서아프리카를 시작으로 1963년기니비사우, 1964년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로 퍼져나갔다.안토니우 드 스피놀라 장군 등 몇몇 육군 원로 장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 정책을 유지하는데 확고한 듯 하였다.[40]해외 전쟁에서 군사적 해결책이 유지불가능하다고 주장한 자신의 책 "포르투갈과 미래"(포르투갈어:Portugal e o Futuro)로 인해 스피놀라는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는 육군 내 청년 장교들의 늘어나던 불만을 가중시켰고, 이들은 1974년 4월 25일카네이션 혁명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41]
이어혁명 진행 과정(포르투갈어:Processo Revolucionário em Curso)이라 불리는 여러 사회정치적 세력간 매우 열띤 정치적 대립기가 나타났으며, 이는 포르투갈이 공산주의 방향의 새로운 독재기로 빠져들려 했던, 뜨거운 여름이라 불린 1975년여름에 극에 달했다. 이 기간 포르투갈은 모든 아프리카 식민지의독립을 승인한다.[42]
1975년 11월 25일 주로 리스본 군사지역 내 낙하산부대원과 헌병이 주축이 된 여러 급진 좌파 군부세력은 쿠데타 시도를 하지만, 이들은 뚜렷한 지도부를 갖지 못했다.9인방(포르투갈어:Grupo dos Nove)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안토니우 하말류 이아느스가 지휘하는 군사계획을 실행에 옮겨 대응했다. 이들이 승리하면서 다음 해민주주의가 공고히 하는데 기여한다. 하말류 이아느스 본인은 다음 해 보통 선거로 뽑힌 첫 포르투갈 대통령이 된다. 또한민주주의 헌법을 승인하고, 지방자치단체와아소르스,마데이라 지방자치정부를 수립한다.[43]
포르투갈의 대륙부는 유럽의 남서쪽 끝에 위치하며 오직스페인 한 국가와 국경을 접하지 않는다. 대륙부의 국토는 가장 중요한 하천인타구스강(테주강)을 중심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북쪽은 내륙으로 이 지역에서 농업이 발달한 사이사이 낀 고원을 가진 산악지역의 풍경을 보인다. 남쪽으로는 알가르브 지방까지 드문드문 산맥이 나타나는 평원이 큰 특징으로 나타난다. 다른 주요 하천으로는 테주강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 발원하는도루강,미뉴강,과디아나강 등이 있다. 이들 강 사이사이로 강줄기가 포르투갈 영토 내에서만 흐르는 강이 있다. 이러한 강으로는보가강,사두강 등이 있으며, 더불어 이러한 포르투갈 내에서만 흐르는 강 중 가장 긴몬데구강은 포르투갈 대륙부에서 가장 높고, 포르투갈 내에서는아소르스 제도의 피쿠 산 다음으로 높은세하다이스트렐라 산맥(해발 1,993m)에서 발원한다.[48].
아소르스 제도는 대서양중앙해령의열곡에 위치하며, 1563년상미겔섬 분화와 1957년의파이알섬 서쪽 면적이 늘어난카펠리뉴스 화산 등 몇몇 섬에서는 최근에도 화산활동을 보여줬다.[49]동조앙드카스트루 퇴(堆)(포르투갈어:Banco D. João de Castro)는테르세이라섬과상미겔섬 사이 해저 14m 깊이에 위치한 거대 해저화산이다. 1720년 분화를 시작하면서 섬 하나가 생성되어 수 년 동안 수면 위에 남아 있었으며, 새로운 섬이 머지 않은 미래에 솟아 오를 가능성이 있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높은 곳인피쿠섬의피쿠산은 해발 2351m에 달하는 화산이다.[50]
대서양 중앙해령의 열곡 지대에 위치한 아소르스 제도와 달리,마데이라는아프리카 판 안쪽에 위치하며지각판 이동이 아닌열점 활동으로 생성되었다. 이러한 안정적이고, 지각판 내부에 위치한 까닭에 포르투갈에서지진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다. 증거가 있는 마지막 화산 분출은 약 6000년 전마데이라섬에서 일어났으며, 현재는 도로 터널 또는 본섬 내륙의 물 저장 갱도 굴착 과정에서 배출된 화산가스나 뜨거운 탄산수 같은 간접적 형태의 화산활동을 보여주고 있다[51]. 마데이라에서 가장 높은 곳은후이부 봉으로 해발 1862미터로[52], 이는 포르투갈에서 세 번째로 높은 곳이다.[53]
포르투갈은 본토 1230 km, 아소르스 667 km,데제르타스 제도,셀바젱스 제도,포르투산투섬을 포함한 마데이라가 250km로, 긴 해안을 갖는다. 이러한 해안은 다양한 절벽과 모래사장과 함께 아름다운 해변을 형성하고 있다. 암석으로부터 생성된 본토의 해안과 달리, 포르투산투섬에는 조개껍질과 같은 유기물로 만들어진 9km에 달하는사구가 있어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포르투갈 해안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아베이루 가까이 위치한보가강 하구의아베이루 히아(포르투갈어:ria de Aveiro)로, 길이 45 km, 최대 폭 11km에 달하며, 어류와 해양 조류가 풍부하다. 4개의 수로 사이에 여러 크고 작은 섬들이 있고, 4개의 강이 대서양으로 접어든다.[54] 또한 사취가 형성되어 석호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포르투갈의 해안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 중 하나로 여겨진다. 포르투갈은 유럽에서도 큰 축에 속하는 약 1,683,000 km2에 달하는배타적 경제 수역을 갖는다.[55]
포르투갈은지중해성 기후를 나타내며,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라 남쪽은 "Csa", 북쪽은 "Csb"로 분류된다.[56] 포르투갈은유럽 국가들 중 가장 온화한 기후를 갖는 나라 중 하나로, 포르투갈 본토의 연 평균 온도는 북부 내륙 산악지역이 13°C, 남부과디아나강 유역이 18 °C 정도의 다양성을 보인다.[56]북부 지방 고지대와 최북단 해안 지방,중부 지방에서의여름은 온화한 편이다.가을과겨울은 보통 바람이 많이 불며,비가 많이 내리고 선선하다. 중부와 북부 지방의 주에서 가장 추우며, 이들 현 가운데 일부에서는 가장 추운 기간 중에는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기도 한다. 하지만 포르투갈남부 지방의 도시에서는 온도가 0°C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 드물며, 대개의 경우 5 °C 정도에서 머문다.[57]
보통봄과여름에 낀 달에는 날씨가 맑다. 온도는 건조한 7, 8 월에 가장 높은데, 심한 날의 경우 포르투갈 대부분 지역에서 간간히 최대온도가 40°C를 넘으며,[58]알렌테주 지방 내륙에서는 이러한 일이 더욱 빈번히 발생한다.[59] 여름에는 최근 기상 연구 보고서 기록의도루강 계곡의코아 계곡 선사유적 공원의 예와 같이 50°C까지 올라갈 수 있다.타구스강과도루강 유역과 같은 몇몇 지역에서는 연 평균 기온이 20 °C에 달할 수 있기도 하다.[60]
최고 기온은상조앙다베스케이라의히오다드스에서 기록된 50.5 °C 다.[61] 총 연평균 강수량은 북부 산악지방에서 3,000mm를 조금 넘고,알렌테주 지방 남부 지역에서 600mm에 못 미치는 등의 편차를 보여준다.[56] 일조 시간은 연 2500~3200 시간으로, 평균적으로겨울엔 일일 4~6시간,여름엔 일일 10~12시간 정도이며,남동부 지역에서 최대,북동부 지역에서 최소 값을 보인다.[58][62]
포르투갈에는 100여 종이 넘는 민물 어류가 서식하며,테주국제자연공원의 거대한 유럽왕메기(Silurus glanis)에서서부 지역의 작은 호수에서만 사는 작은 고유종까지 다양한 보습을 보여준다. 이들 중 몇몇 특정 희귀종은 서식지 감소, 오염, 가뭄 등으로 인해 상당한 수준의 멸종 위협에 처해있다. 포르투갈의 해양은 세계에서도 풍부한 생물다양성을 보여주는 곳 중 하나다. 해양생물종은정어리 (Sardina pilchardus),가랑어,대서양고등어를 포함해 수천 종에 이른다.[66]
또한 특히 포르투갈의 서부 해안에서는용승 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데, 이는 바다의 영양과 생물다양성을 매우 풍부하게 해준다.[67]포르투갈의 보호 구역은페네다-제레스 국립공원부터이스트렐라 산맥 자연공원에 걸친국립공원 (parque nacional) 1곳,[68]자연공원 (parque natural) 13곳 (가장 최근엔 2005년 지정),[69]자연보호구역 (reserva natural) 9곳,[70]천연기념물 (monumento natural) 5곳,[71],경관보전 지역 (paisagem protegida) 6곳이다.[72] 2005년 이스포젠드 해안경관보전 지역(포르투갈어:Área de Paisagem Protegida do Litoral de Esposende)이 "해안선과 물리적, 미학적, 경관적 자연요소의 보존"을 위해북부해안 자연공원(포르투갈어:Parque Natural do Litoral Norte)으로 승격되었다.[73]
포르투갈의 인구는 0~14세 16.4%, 15~64세 66.2%, 65세 이상 17.4%로 구성되며, 평균 기대수명은 78.04년이다. 문자해독률에 대해서는 93.3%가 읽고 쓸 수 있으며, 문맹률은 수년에 걸쳐 점정 낮아지고 있다.[75] 인구 성장률은 0.305%로, 인구 1000명 당 10.45명이 태어나고 10.62명이 사망하며, 2010년 출생률은 1.32로, 이는 인구가 대체되지 않는 데에 원인이 되고 있다.[76] 포르투갈의 5세 이하유아 사망률은 2010년 1000명 당 3.7명으로, 이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다.[77]
비록 포르투갈이 선진국이지만, 수돗물과 전기에 대해 접근할 수 없는 상당히 감소된 수의 인구가 존재한다.[78] 기본 위생 시설 또한 전역을 담당하지 못하며, 알렌테주 및 리스보아이발르두테주 지역에서 가장 많은 수의 인구가 위생 시설에 대해 접근할 수 있다. 현재 상당수의 주택이 정화조를 갖고 있으며, 일부는 어떠한 형태의 위생 시설도 갖지 못하고 있다.[79] 의료에 대한 접근은 95~100%의 인구에 보장되어, 전 인구에 보건으로의 접근이 보장되고 있다.[80]
가톨릭 신자들 사이의 세계적 명성으로 인해 "세계의 제단"으로도 불리는 포르투갈의파티마 성지. 포르투갈 인구의 84.5%는로마 가톨릭을 따른다.
포르투갈의 헌법은 완전한종교의 자유와 종교간평등을 보장하지만,[94] 사회생활의 여러 측면에서, 가톨릭 교회에 특혜를 주는 협약이 존재하며,[95] 건물 준공식 또는 국가의 공식 행사와 같은 일부 공공 공식 행사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표가 참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선출된 정치인의 종교적 태도는 유권자에게 무관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최근의 두 대통령인마리우 소아르스와조르즈 삼파이우는 잘 알려진세속주의자였다.[96]
2001년인구조사의 공식 결과에 따르면 포르투갈 전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84.6%는로마 가톨릭 전통을 따르는 것으로 나타났다.[97]로마 가톨릭교회의 2001년 자체 연구에 따르면 일요일 미사는 1,933,677명(전체 인구의 18.7%)의 가톨릭 신자가 참여하며,영성체를 받은 사람은 1,065,036명(전체 인구의 10.3%)이다.혼인의 절반 가까이가 자동적으로 효력을 갖는 가톨릭식 혼인으로 이뤄진다. 동성간 결혼 및이혼 또한 민법에 따라 상호 동의 및 이혼의 경우 배우자 중 한 명이 법원에 요청 시 허용되지만,교회 혼인법에서는 이러한 동성간 결혼을 제공하지 않는다. 포르투갈에는브라가,리스본,에보라 세 대교구로 묶인 20개의 교구가 있다.[98] 다른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2004년 포르투갈의 가톨릭 인구는 90.41%이며, 포르탈레그르-카스텔루브랑쿠 교구에서 가장 많은 99.35%, 베자 교구에서 가장 적은 83.42%의 수치를 보여줬다. 리스본 교구와 포르투 교구는 각각 85%와 90.59%의 가톨릭 인구를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99]
포르투갈에서여호와의 증인은 650여개 교회에 퍼진 50,000명에 가까운 신도를 보유하며, 비슷한 수의 지지자를 얻고 있다. 95,000만 명 이상이 2007년최후의 만찬을 주요 행사로 여겼다. 본 종교는 1925년 이래로 포르투갈에 존재해 왔고, 1961년에서 197년 사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으며, 이 기간 중에는비밀리에 운영되었다. 1974년 12월 여호와의 증인 협회가 합법적으로 인정되어, 오늘날알카비데시에 본부를 두고 있다. 포르투갈은 본 종파가 현재 활동하는 236개국 중 하나이다.[101]
포르투갈의유대 공동체는, 강제 개종, 추방, 감금 및 이어진 포르투갈종교 재판을 통해 행해진 처벌을 선택하도록 한 1496년 국왕마누엘 1세의 포고에 따른유대인 추방령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지만, 이러한 이유로 유럽에서 가장 활발한 공동체 중 하나였던 포르투갈 공동체는 몰락하였다. 국경지대 마을인벨몬트에서 이 종교가 발전한 형태는 포르투갈에서의 유대인이 하나로 뭉쳐 견뎌낸 예 중 하나이다. 1506년 리스본에서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난혹한 수준의유대인 학살이 일어나 2000명에서 4000명 가량이 목숨을 잃었다.[102]
포르투갈에서 가장 중요한 법은 다른 모든 법을 관장하는 1976년 제정된헌법이다. 다른 주요 법으로는민법 (1966년),형법 (1982년), 상법 (1888년), 민사소송법 (1961년), 형사소송법 및 노동법이 있다. 이러한 모든 법은 첫 발간 이후 여러 차례 개정되었다.[105]
포르투갈의 대통령은국가원수로서, 5년 중임제로써 1번 연임은 가능하며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포르투갈은 오랜 기간 여러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는 대신에총리의 권한이 강화 시켰다, 현재포르투갈의 대통령은 내각 활동을 감시하고, 최고 통수권자로써 육군, 해군, 공군, 공화국 수비대 등 국군을 지휘하며, 대외적으로 포르투갈을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세 역할을 수행한다. 공식적으로 리스본벨렝 궁전에 거주한다.[105]
1975년 이후 포르투갈의 정치 구도는사회당(PS)과사회민주당(PSD) 두 정당이 주도해왔다. 이 두 정당은 민주주의 수립 이후 실질적으로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의 통치 및 행정 업무를 나눠 갖고 있다. 그러나 몇몇 지방자치단체 수장을 갖고 노동운동에 큰 영향을 끼치는공산당(PCP)이나, 이미 사회당 또는 사회민주당과 연정을 통해 정권을 잡은 경험이 있는민주사회중도국민당(CDS-PP)과 같은 정당 또한 정치권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이 외에도좌익블록(B.E.)과생태주의 녹색당(PEV)도 의회내 의석을 갖고있다.[105]
포르투갈은 유럽 연합의 주요 수혜국으로, 유럽 통합을 지지한다.유럽 이사회 의장국 직무를 1992년, 2000년, 2007년 세 차례에 걸쳐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포르투갈은 의장국 임기 동안 유럽의 경제를 더 역동적이고 경쟁력 있게 변화시키도록 유럽연합과아프리카 간 대화를 추진하였고, 가장 최근의 임기에는 후에리스본 조약으로 알려진, 개정 조약을 다른 회원국들과 함께 구성, 서명하였다.[47]
포르투갈은NATO의 창립 회원국으로,발칸반도 평화유지군에 다수의 파견대를 보내는 등 동맹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포르투갈은 다른포르투갈어 사용국과 유대관계를 증진시키고자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CPLP)의 창설을 제안하였다.[109] 또한 스페인과 함께이베로 아메리카 정상회의에 참여하고 있다. 포르투갈은미국,아시아 동맹국들,UN과의 긴밀한 협력속에 군대와 자금을 지원하며, 옛 해외주였던동티모르의 독립을 확고히 지지하였다.[110]
브라질과는 두 나라를 이어주는 역사 외에 조약을 통해서도 우호 및 동맹관계를 갖는다. 또한영국으로 이어지는잉글랜드와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영국-포르투갈 동맹(윈저 조약)을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다.[111]
유일한 국제 분쟁으로는올리벤사(포르투갈어:Olivença,스페인어:Olivenza) 분쟁을 들 수 있다. 1297년 이후 포르투갈의 영토였던 올리벤사는오렌지 전쟁 이후 1801년바다호스 조약에 의해 스페인에 양도되었다. 포르투갈은 1815년빈 회의를 통해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오늘날 이 도시는 동명의 스페인 도시와 여기서 분리된탈리가(포르투갈어:Táliga)로 구성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이웃 국가간 양자 외교 관계는유럽 연합 내에서도 우호적이다.[112]
대한민국과는 1961년 수교[113], 뒤이어 14년 후인 1975년에북한과 수교해 남북한과 동시에 수교했으나 2017년부터 북한의 미사일 등의 대외 도발로 인해 2017년 10월 12일 북한과 외교 관계를 공식으로 파기해 대한민국 단독 수교국으로 회귀했다.[114]
주민 안전은공화국 수비대(포르투갈어:Guarda Nacional Republicana,GNR)와공공안전 경찰(포르투갈어:Polícia de Segurança Pública,PSP)의 임무이다.[119][120] 이 외에 포르투갈은 주 범죄 수사 조직인사법경찰(포르투갈어:Polícia Judiciária,PJ)이 있으며, 이들은 주로 조직범죄, 테러리즘, 마약 유통, 부정부패, 금융경제 범죄 등을 담당한다. 사법경찰은공공부의 지휘 아래 행동하며,법무부에 통합되어 있다.[121]
포르투갈의 주요 행정 구역은 308개 자치단체(conselho)와 4,260개 구역(freguesia)으로 나뉜 본토의 18개현(distrito)과아소르스 및마데이라 2개자치 지방(região autónoma)이다.[122]현은 포르투갈에서 가장 중요한 행정 구역 단위로,선거구 등 행정적으로 활용되는 기초로 이용된다.[123]
1976년 이전에는 대서양 제도 역시 일반적인 포르투갈의 현 구조에 통합되어 있었지만, 인접 도서의 자치 현 지위[124]에 따라 고유 권한을 가진 총회(포르투갈어:Juntas Gerais)가 존재하는 본토와는 다른 행정 구조를 가졌다. 아소르스에 3개, 마데이라에 1개 현이 존재했다.
비록 현이 포르투갈 본토에서 우선적인 행정구역 구분이지만, 또 다른 우선적인 기술적 구분이 있다. 이는 포르투갈 내 NUTS 2단계와 일치하는 지역협력개발위원회(Comissões de Coordenação e Desenvolvimento Regional)에 의해 만들어진 다섯 개의 큰 지방으로 구성된다. 이들의 경계는자치단체의 경계를 따르지만 현의 경계는 따르지 않아 한 현이 한 개 이상의 지방에 걸치기도 한다.[130]
NUTS 2단계 지방은 NUTS 3단계로 불리는 행정적 의미가 없는 통계적인 준지방으로 나뉜다. 이는 유사한 문제를 가진 인근 자치단체를 묶고 주로 경제계획에 대한 통합적인 자료를 얻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129]
관광은 포르투갈 매우 중요한 부문으로 지속되어 왔으며, 매년 방문자수가 의미있게 증가해왔다. 하지만 최근크로아티아 같이 비슷한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몇배씩 저렴한동유럽 관광지와의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포르투갈은 이러한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의료, 생태, 농촌 관광 같은 틈새 볼거리에 집중하게 되었다.[134]
포르투갈은 매년 1,300만명의 외국인 관광객을 맞이하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방문하는 20개국 사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135] 관광은 포르투갈경제에 있어서 계속해서 더 중요한 자리를 맡아가며, 2010년 전체국내총생산에 약 11%를 기여하였다.[136]
포르투갈의 주요 관광지는리스본,알가르브,마데이라 등으로, 포르투갈 정부는 계속해서도루강 계곡,포르투산투섬,알렌테주와 같은 새로운 관광지를 개발하고 홍보하고 있다. 2005년리스본은 시내 호텔에 7백만명의 투숙객이 찾아,바르셀로나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관광객이 많이 숙박하는 도시로 선정되었다.[137]
2017년 기준으로 포르투갈의 주요 수출 상대국은 스페인(25.21%), 프랑스(12.51%), 독일(11.33%),영국(6.62%), 미국(5.17%)이다. 주요 수입 상대국은 스페인(31.99%), 독일(13.72%), 프랑스(7.39%), 이탈리아(5.47%), 네덜란드(5.35%)로 주요 수출입 상대국은 미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인접 유럽 국가들이다. 2017년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62,170백만 달러, 총수입액은 77,834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석유 제품(3,790,577천 달러), 종이(1,307,304천 달러), 자동차(1,206,722천 달러), 자동차 부품(1,268,859천 달러), 공압 타이어(1,018,183천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석유 및 오일(5,544,580천 달러), 자동차(1,989,64천 달러), 기타 의약품(1,840,051천 달러), 자동차 부품(1,416,258천 달러)이다.[138]
↑Sousa, Manuel (2000). 《Reis e Rainhas de Portugal》.멩 마르팅스: SporPress. 31 ~ 35쪽.ISBN972-9725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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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Mattoso, António; Henriques, Antonino (1965년). 《História Geral e Pátria》. II volume: Idade Moderna e Contemporânea.리스본. 124~129쪽.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editora= (도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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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icadores de Conforto das Família — 1997, INE, 2002.
↑"포르투갈 공화국 헌법" 13조 2항: "Ninguém pode ser privilegiado, beneficiado, prejudicado, privado de qualquer direito ou isento de qualquer dever em razão de ascendência, sexo, raça, língua, território de origem, religião, convicções políticas ou ideológicas, instrução, situação económica, condição social ou orientação sexual"; e artigo 41.º sobre a liberdade de consciência, de religião e de culto.
↑Rodrigues, Arinda (2005). 《Os Papas — De São Pedro a João Paulo II》코헤이우다마냥 특별판 (포르투갈어). Fascículo XI, "Leão XIII lança doutrina social da Igreja". 250쪽. CS1 관리 - 추가 문구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