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시(平壤市)는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수도이고, 최대 도시이기도 하다. 도시의 중심으로대동강이 흐르며,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하였다.
고려 때는서경(西京)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지금의 평안남도평양시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별칭으로 '혁명의 수도'(革命首都)라고 부르며,소련의 건물 양식과 유사한 건물들이 지어졌다.한국 전쟁 때대한민국 국군이 잠시 점령한 적이 있다.1967년부터는 인구 증가로 인해 신도시 건설을 추진하여, 다양한 건축물이 세워졌다.
평양의 면적은 1,849 km2,[1][3][4] 인구는 약 287만 명 (2016년 기준)이다.[2]
평양 준평원(平壤準平原)에 위치해 있다. 위치 상으로는 북한 남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 동쪽과 서북쪽은평안남도에, 서남쪽은남포시에, 남쪽은황해북도에 접한다. 휴전선에서는 중부전선 기준 최단거리 약 120km로 휴전선에서평택까지의 거리와 비슷하여, 휴전선에서 50~70km 떨어진서울만큼의 최전방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닥 휴전선에서 멀다고 볼 수도 없다.
평양에는대동강이 흐르는데, 강 좌측에 형성된 중심부를본평양(本平壤), 서쪽을서평양(西平壤) 그리고 강을 건너 동쪽에 형성된 시남쪽으로 가지를동평양(東平壤)으로 나누기도 한다. 평양시의 중심은 중구역이며,1950년대 이래 내각청사,인민대학습당,조선미술박물관,평양학생소년궁전을 비롯한 특색있는 건축물들이 건설되었다. 평양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는 창광거리, 영광거리, 광복거리, 창전거리
, 미래과학자거리, 려명거리, 락랑거리 등이다.인민대학습당 앞에는김일성광장이, 부근에는주체사상탑이 있는데 평양의 상징이 되고 있다.
공민등록법의 규정에 따라 '17세 이상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은 공민증을 발급받지만, 평양시민은 1997년부터 특별히 '평양시민증'을 발급받아 다른 지역 주민과 차별을 두고 있다.
평양은 낮은구릉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평야가 많아 농업이 발달했다. 주요 산은만경대구역에 있는 룡악산(龍岳山),중구역에 있는 창광산(蒼光山), 대동강구역의 문수봉(紋繡峰)이 있다. 대부분 산은 휴양지나 유원지로 만들어졌다.
중심지에 위치한 산은모란봉(95m)이고, 그 동쪽 주변에대성산(270m)이 있고, 그 북쪽으로 청운산(373m)과 용골산(400m)이 있다. 모란봉의 동쪽의 비교적 높은 산지가 시작하는 초입에는 제령산(498m)이 서 있다.[5]
평양은여름이 되면홍수가 발생하여농업이 어려웠으나,김일성(金日成)이 직접 지시하여보통강(普通江)의 관개공사를 실시함으로써, 홍수 피해가 적어지고, 농업이 발달하게 되었다고 한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김일성이 보통강을 옥토, 살기 좋은 땅으로 만들게 하였다고 선전(宣傳)하며,보통강구역에 기념탑이 건설되었다.보통강 근처에는 보통강유원지가 있어서 시민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평양은 옛부터 평평한 땅, 벌판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부루나', '바라나'라고 불렀는데, 이를이두로 바꿔서 '부루'가 '평'(平), '나'가 '양'(壤)이 되었다. 평양은고조선의 마지막 수도였던왕검성이 있었던 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 중 하나이다. 427년에는장수왕이 고구려의 도읍을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했다.평원왕 시대였던 586년부터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까지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였던평양성이 위치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고려 시대(高麗)에는 서경(西京)으로 불려 중요시되어, 황폐해진 평양을 부흥시켰다.947년고려 정종(定宗)은도참설에 따라 서경성(西京城)을 쌓고 천도하려 하였으나 귀족들의 불만과 백성들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고,1136년에는고려 인종(仁宗)에게묘청(妙淸),정지상(鄭知常), 백수한(白壽翰) 등이서경천도론을 건의하여 추진되었으나,김부식(金富軾)을 중심으로 한 문벌 귀족들의 반발과 민심의 이탈로 인종이 중지를 명함으로써 좌절되었다.
고려 말기신돈(辛旽)은공민왕(恭愍王)에게 평양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선 시대(朝鮮時代)에도 평양은 조선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이자,평안도(平安道)감영 소재지로서관서 지방의 행정 중심지였다.
1866년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으며,1894년청일전쟁(淸日戰爭) 때는청군(淸軍)과일본군 사이의 격전지가 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1896(건양 1)년 평안도가 남북으로 분할되자평안남도에 소속되었다.
평양, 1907년
구한말기에는기독교가 크게 확산되었는데,1901년부터 평양에서는평양신학교라는장로교 신학교가 문을 열었고, 최초의 장로교 목사들을 배출하였다. 평양을 비롯한평안도는 오랜기간동안 지역차별에 영향을 받은 것들이 적지 않게 있어서 지역 향반(향리)와 일반 평민의 삶은 차이가 크게 없었다. 이 때문에 평양을 비롯한평안도에서는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평민문화 및 상업문화가 일찍이 발달하였고,기독교 신자가 상당히 많이 거주했었다.[6]
1902년 대한제국 고종은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육성하고자 하여풍경궁을 설치하였으나,러일전쟁으로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광복 후38선 이북은소련군정(蘇聯軍政)이 들어섰다. 1948년에 소련군이 철수하였다.1946년9월 1일에는 삼팔선 북부 지역의 실질적인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평양부는 평안남도에서 분리되어 중구역, 동구역, 서구역, 남구역, 북구역의 5개 구역을 포함하는평양특별시로 승격되었다.
1952년8월 1일에,행정 구역 체계를 기존의 4단계에서 3단계로 개편하면서평양직할시로 변경되었고, 1956년에 만경대구역과 서성구역을 신설하였으며, 1967년부터[출처 필요] 본평양(本平壤), 서평양(西平壤), 동평양(東平壤)으로 나누고,1972년1월 1일에는 임시수도가 아닌 공식 수도가 되어평양특별시로 재승격되었으나, 이후 평양특별시는2006년1월 1일에평양직할시로 다시 격하되었으며, 그 2006년 당시에, 19개 구역 4개 군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편 평양은한국 전쟁 때미국의 폭격으로 인해, 공공 건물과 공장 건물들이 모두 많이 파괴되었으며, 보통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버려서 도시의 원래 본 모습을 잃어버렸다.[9] 전쟁 이후소련으로부터 도입된 조립식 건축기법과 시멘트 가공공업의 발달로 동평양과 평양시 중구역에 5층 내지 15층짜리 고층 아파트가 건설되었으며, 천리마(千里馬)거리와 창광거리, 평양역 앞 역전(驛前)거리를 비롯한 큰 도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국민은국가보안법에 의거하여 평양을 방문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기타 외국인의 경우 평양을 방문하게 되면 의무적으로금수산태양궁전을 방문해서김일성,김정일 부자에게 예우를 갖추어 인사를 해야만 한다. 북한 정부에서 이를 강제로 시키기 때문에 거부하는 게 불가능하다.
또한 북한에서는 평양을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통역관을 빙자해서 의무적으로 감시 요원을 할당하며 이 감시 요원의 범위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북한 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할 경우오토 웜비어의 사례가 있듯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가서 죽을만큼고문을 한다.
평양의 묘역은 항일 유격대원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이바지한 사람들 위주로 조성되어 있다.
금수산태양궁전:대성구역에 있다. 다름 아닌 북한의 전직 수령들인김일성과김정일이 안장된 묘역으로 북한에서 가장 특별한 묘역이다.김정은 역시 사망하면 이 곳에 안장되며 오직 북한의 수령들만 안장되는 특별묘역이다. 영구는 방부 처리하며 이 비용만 상당한 수준의 금액이 소모되고 있다.
혁명렬사릉: 대성산(大聖山)에 있다. 1920~30년대 김일성과 함께 만주지역에서 이른바 항일유격대 활동을 했다는 지휘관급 132명의 묘역이 있다. 반신상과 분묘, 비석이 하나씩 놓여있다.
애국렬사릉:형제산구역 산미동에 있다. '조선의 공산주의 사회 건설에 기여했다'고 평가받는 인사 650여명이 있으며, 계속 늘어나고 있다. 돌사진과 분묘, 비석이 하나씩 놓여있다.
월북 및 납북인사들의 묘:룡성구역 룡흥 1동에 있다.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했거나6 .25 전쟁때 서울에서 후퇴하면서 강제 납치하여 북송한 대한민국 인사 62명의 묘역이 있다.고려대학교 초대 총장현상윤,국방경비대 총사령관송호성, 초대 국회의원조헌영,정인보 등 명망있는 인사들의 묘역이 있다. 돌사진과 분묘, 비석이 하나씩 놓여있다.
↑가나2010년 행정 구역 축소 전의 2,629.4 km2에서2010년에황해북도로 이관된승호구역 159.3 km2,중화군 232.4 km2,상원군 490 km2를 제외한 면적. 이들 지역과 함께황해북도에 편입되었던강남군(160.3 km2)은2011년에 평양 직할시로 재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