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흑해에 면한 서부는 습윤한아열대 기후 지역, 동부는 건조한스텝 기후 지역이다. 주민은조지아인이 70%,아르메니아인이 8%,러시아인이 6%,아제리인이 6%,오세트인이 3% 등이다. 아열대 농업지대에서는 차·귤·레몬·담배·올리브의 재배와 양잠이 행해지며, 동부에서는 양의 이목(移牧)이 성하다. 광물자원(망간·철)과 수력자원이 풍부하여, 제철, 기계, 트럭 등의 공업이 발달해 있다.[8]
현지인들이 자신의 나라를 부를 때는 "사카르트벨로[9] "라 하며, 대외적으로러시아식 표기[그루지야]로 통용되어 왔으나, 2008년러시아의 자국 침공 후 중앙정부는 자국어 표기인 "사카르트벨로"나 영어식으로"조지아(Georgia)"로 수정요구해왔다.
조지아의 영어 이름인 Georgia와 러시아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의 기존 이름인 "Gruziya"는 아랍-페르시아어에서 유래한 Gurjan 또는 Gurzan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이름들은 페르시아어 gurj(Gurjistan, "늑대의 나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페르시아어 gorg(늑대)에서 유래했으며 고대 페르시아어 vrkan.
2010년에 조지아 정부에서대한민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에 자국 국명을 러시아어식 표기를 대체해 표기해 달라고 공식 요청하였으며, 대한민국은조지아로 한국어 표기를 수정했다.
조지아가 속해 있는 캅카스 지역은흑해와카스피해 사이의 지협으로아시아와유럽의 중간에 있어 오랫동안 각 방향에서 온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세계에서 가장 혼란스러운인종분포를 보이는 곳이다. 조지아는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와 함께캅카스 지역 국가에 속해 있으며 소련에서 떨어져 나온 신생국가다. 3개국이 처음으로 통일된 것은 10세기-13세기였으나 해체됐다가 18세기에 들어 재편성되었다. 조지아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로서 조지아가 처음으로 침략받은 것은 기원전 8세기 그리스로부터였다.
400년경에는 서아르메니아와 서조지아가비잔티움 제국에 의해 지배를 받았고이베리아의 동부는 7세기 중반 무슬림 아랍의 지배를 받기 전까지 페르시아 제국이 점령하고 있었다. 아랍과 비잔틴의 다툼은 1060년 아르메니아를 점령한셀주크 제국의 지배를 받는다. 절대다수의 우수한 조지아 기독교인들이 피난을 갔는데 이 당시는 조지아가 이베리아란 이름으로 결합해 있던 시기다. 1122년 아랍제국에 의해트빌리시가 회복되던 시기는 조지아의 황금시기로 아제르바이잔의 서부와 터키의 동부까지 영토가 확장돼 있었다.
이 안정과 번영은 오래가지 못하고 곧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멸망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800년 동안 조지아는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조지아는 여러 봉건 제후들로 분할되어 사파비 페르시아와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았고,18세기 이후러시아 제국의 세력도 확대해 오기 시작했다.18세기 후반러시아의예카테리나 대제는 군대를 이끌고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던 조지아 서부 지역으로 진출하여 그 세력을 확대했고 페르시아가 점령했던 지역을 획득했다.1870년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조지아의 지배권을 완전히 얻었다.
이후 조지아 지역의 민족사회주의자 운동은 제1그룹, 제2그룹, 제3그룹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가장 진보적인 제3그룹은 이오세브 주가슈빌리가 속해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이름을 러시아식으로 "철의 남자"로 바꾼이오시프 스탈린이다.1917년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자 조지아는조지아 민주 공화국을 세우고 독립을 선언했다. 공화국은 국제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았고, 러시아도 독립을 승인했다. 그러나 소련의붉은 군대는 다시 조지아를 점령하여 소련에 편입시키고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과 함께자캅카스 연방을 수립해서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본래 조지아 출신이었던 스탈린은 조지아 민족주의자 십만 명 이상을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1936년 자캅카스 연방을 해체하여 각각그루지야,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으로 분리되어 조지아의 국명을 되찾았지만 독립하지 못하고 계속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의 하나로 남아 있었다.
소련 시절, 조지아의 민족운동은 억압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소련의 중앙 정부와 타협하여 소련 중앙 정치무대에 고위직으로 등장하는 조지아 출신 인물도 있었는데,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내다가1985년고르바초프 정권 출범 후 소련 외무장관이 된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가 대표적이다.1970년대에 소련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있어왔고, 동시에 공화국 내의 소수민족인압하스나남오세티야와의 갈등도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민족 대립은1980년대 고르바초프 시대 이후 더욱 심해졌으며 조지아인들은 조지아의 소련 독립을 시도하고 동시에 압하스의 분리 독립 운동을 저지하려고 했다. 복잡한 정국 속에1989년트빌리시에서 시위 중이던 군중에게 소련군이 발포하여 수십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 독립 운동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개혁, 개방 열풍 속에1990년 조지아 역사상 최초의 다당제 선거가 실시됐고 친러시아 성향의압하지야와남오세티야 지역에서는 소련 잔류를 원하며 독립 다툼이 일어났으나 조지아는 소련 해체에 앞서1991년4월 9일 독립을 선언했다. 소련 해체가 확정되고1991년12월 25일 조지아는 완전히 독립하여 조지아 공화국이라는 새로운 독립국이 되었으나, 국내의 정파 대립과 민족 문제로1992년 ~1994년 내전에 돌입하여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독립 선언과 함께 초대 대통령이 된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는1992년 축출되었고, 소련의 외무장관 출신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던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가 국제적인 관심 속에 국가원수직을 대행했다. 그러나 내전과 정정 불안이 계속되자 전 대통령 감사후르디아는 망명 후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셰바르드나제는1995년 정식으로 대통령으로 취임했고1997년 무렵부터 정부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국내의 대립과 취약한 경제 사정으로 조지아는 계속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고, 셰바르드나제 대통령도2003년 선거 부정 등의 혐의로장미 혁명으로 불리는 시민 운동으로 실각하는 등 정정 불안이 계속되었다.
3월 28일 시행된 새 의회 선거에서 민주국가운동은 75%에 달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제2당인우익연대는 약 7%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이 선거는아자리아(Ajaria)의 지도자아슬란 아바시제와 중앙정부 사이의 긴장에도 불구하고 조지아 독립 이후 가장 자유로웠던 선거이다.
조지아 중앙정부와 아쟈리아 사이의 긴장은 선거 이후부터 4월 말까지 급속도로 증가,5월 1일 아바시제가 조지아 정부의 군사 시위에 대해 아쟈리아와 조지아를 연결하는촐로키 강에 놓인 세 개의 다리를 파괴하며 절정에 이르렀다.5월 5일 아바시제는바투미에서 행해진 그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로 인해 쫓겨나게 되었다.
2005년2월 3일 수상 주라브 주바니아가크베모 카르틸리의 부지사인라울 우수포브의 집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하였다. 그 날 비상내각이 소집되었고 바라미제가 수상 직무대행으로 임명되었다.
2008년8월에 조지아와 러시아는 짧지만 피해가 큰전쟁을 벌였으며 그 결과독립 국가 연합에서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2008년8월 30일에 조지아는러시아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기로 선언했다.[10] 러시아가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의 독립을 승인하자, 조지아는 자치 공화국과 1991년에 맺었던 휴전 협정을 폐기했다.[11] 결국,9월 3일에 조지아와 러시아의 외교관계는 공식적으로 단절되었다.[12] 전쟁이 끝난 뒤9월 23일에는 조지아는남오세티야 남쪽상공을 지나고 있던 러시아 정찰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지만, 러시아에선 이를 부인했다.[13] 최근 BBC는 조지아군이 남오세티야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고 보도하였으나,미헤일 사카시빌리 대통령은 이를 부인했다.[14] 조지아는1994년에니카라과와 외교관계를 맺었지만,남오세티야와압하스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했다는 이유로2008년11월 29일에 외교관계를 단절했다.[15] 조지아에서는 반정부 시위가 자주 일어나고 있으며 야당과 정부 간에 충돌이 일어남에 따라 정국 불안이 고조되고 있다.[16] 조지아와 러시아는 남오세티야 전쟁이 끝난 지 2년이 흘렀지만 긴장은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17] 조지아는 총선에서 친러성향의 야당이 승리했다.[18] 그리고 총선에서 승리하면서2013년부터는 의원내각제 형태의 제도를 도입할 것이라고 밝혔다.[19] 이바니시빌리는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첫 방문국은 미국이라고 밝혔다.[20]2012년10월 4일에벨라루스의알렉산드르 루카셴코가 온갖 방법으로 조지아를CIS 복귀를 주도하겠다고 밝혔지만, 조지아 측에서는 벨라루스 대통령의 발언은 신중하지 못했다고 밝혔다.[21]
조지아는흑해의 동쪽,캅카스산맥 지역에 위치해 있다. 북부에러시아, 동부에아제르바이잔, 남동부에아르메니아, 남부에터키가 있다. 산악지역으로 대 캅카스산맥이 북쪽 국경으로 이어지고 소 캅카스산맥은 남부 국경이고 두 산맥의 중앙으로 330km의 평지가흑해로 연결된다. 작은 영토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지형과 다양한 기후의 영향으로 인해 다양한 식물이 서식한다. 산맥은 기온의 변화를 막아 조지아는 지리적으로 환경적으로 생태학 시스템이 격리되어 특유한 다양성이 분포한다. 산림지역은 2.7백만 헥타르의 크기로 국토의 38%를 차지하며 100여종의 동물, 330여종의 조류, 48종의 파충류, 11종의 양서동물, 160여종의 물고기가 서식하고 있다.
공용어는남캅카스어족에 속하는조지아어(71%)이다. 그 외에도러시아어(9%),아르메니아어(7%),아제르바이잔어(6%),튀르키예어,우크라이나어 등이 사용되고 있다.러시아어는 구 소련시절엔 주요 외국어로 가르쳤지만,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어 교육이 폐지되면서 사용자가 줄게 되었다. 2008년 전쟁 이후엔 1곳을 제외한 모든 방송국 채널에서 러시아어 더빙을 금지하는 정책을 실시하기도 했다.[22] 하지만 구 소련의 영향으로 지금도 쓰이고 있다.
위쪽의 우측에서 좌측 순으로 조지아의 유명한 음식 종류별 소개: 아드리안 하차푸리, 므츠바디, 힌칼리, 임머리티안등 하차푸리, 프할리, 추르치헬라, 쇼티스 푸리, 엘아르지, 므차디, 사치비
조지아의 요리와 와인은 수세기에 걸쳐 각 시대의 전통을 적용하여 발전해 왔다. 식사의 가장 일반적인 전통 중 하나는 위 또는 조지 왕조 식탁이며, 이는 또한 친구 및 가족과 사교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조지아의 음식은 모두가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중시한다. 조지아의 여러 역사적인 지역은 그들만의 특색 있는 요리로 유명하다 : 예를 들어, 동부 산악지대 조지아의 힌칼리(고기 만두), 주로 이메레티, 사메그렐로 및 아드자라의 하차푸리 등이 유명한 음식이며 조지아 전통 요리 이외에도 러시아, 그리스 및 최근 중국의 이민자들에 의해 다른 나라의 음식이 최근에 전해졌다.
↑Stephen White, Valentina Feklyunina.Identities and Foreign Policies in Russia, Ukraine and Belarus: The Other Europes. [[Springer Science+Business Media|], Oct 22, 2014 :"The Great Soviet Atlas put the entire Caucasus inside 'Europe', as far as the Turkish border with the USSR (Efremov, “Obsuzhdenie', p. 145); so did the Great Soviet Encyclopedia..."
↑유럽 의회,European Parliament Resolution 2014/2717(RSP), 17 July 2014: "...Georgia, Moldova and Ukraine – like any other European state – have a European perspective and may apply to become members of the Un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