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趙浚)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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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
| 별호 | 자(字): 명중(明仲) 호(號): 우재(吁齋), 송당(松堂) 작위: 충의군(忠義君),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시호: 문충(文忠) |
| 신상정보 | |
| 출생일 | 1346년 |
| 거주지 | 조선한성부 |
| 사망일 | 1405년11월 (60세) |
| 국적 | 고려→조선 |
| 학력 | 1374년 고려 함과에 급제 |
| 부모 | 조덕유(부) |
| 형제자매 | 조후(형) 조인(형) 조정(형) 조순(형) 조견(아우) |
| 배우자 | 이씨 부인 |
| 자녀 | 조대림(아들) |
| 친인척 | 조연(할아버지) 오씨 부인(할머니) 이숭(장인) 조인규(증조부) 조비(고모할머니) 조화(조카) 경정공주(자부) 태종 이방원(사돈) |
조준(趙浚,1346년 ∼1405년11월)은고려 말기와조선 초기의 문신,시인, 무신,정치인, 혁명가이다. 본관은평양(平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우재(吁齋) 또는 송당(松堂)이다. 작위는 충의군(忠義君),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이다.
문하시중을 지낸조인규(趙仁規)의 증손이고 조연(趙璉)의 손자이며 판도판서를 지낸 조덕유(趙德裕)의 5남이고태종 둘째딸경정공주의 부군인조대림의 아버지이다.
1371년(공민왕 21년)음서로 문관 관직에 천거되었다가1374년(공민왕 24년)에 과거(문과)에 급제,공민왕 시대와우왕 시대에 문관(文官)과 무관(武官) 관직을 두루 지내다가1384년 관직에서 잠시 물러났다.
1388년위화도 회군 후이성계의 신임을 받고 관직에 전격 복귀하여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겸 대사헌 등을 거쳐충의군(忠義君)에 봉군되었다.우왕이 폐위되고창왕이 즉위한 직후에 밀직사사(密直司事) 겸 대사헌의 지위로써문하시중조민수를 탄핵하여 축출시키고 이어1389년창왕 폐위 및공양왕 보위 추대에도 개입하였다. 3년 후1392년(공양왕 4년)에정도전 등과 함께 의기상투(意氣相投)하여고려 공양왕을 폐위하고조선 태조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그는 특히 경제와 이재에 밝아 전제 개혁안을 통해 조선의 경제적 기초를 개편하였다. 정치적으로 동반자였던정도전과는 요동정벌 문제로 결별한 뒤, 제 1차 왕자의 난에 협조하여 그 일파를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조선 시대 초기를 통하여 그는 도통사·문하우시중·좌정승 등을 거쳐1403년음력 7월 16일영의정부사가 되었다.조선 태종 이방원은 조준을 가리켜 항상 조정승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그의 아들조대림은경정공주와 혼인하여 평녕군(平寧君)에 봉해지는 등 왕실의 총애를 받으며 권세를 누렸다.[1] 시문에 능하였고1397년(태조 6년)하륜 등과 함께 《경제육전》을 편찬하였다.
1388년 8월우왕에게 관제[2]개혁과 관련하여백관을 바로 잡거나,나라만 알고 자기집을 잊거나,위엄이타국에 가해질 만한 사람이 아니면 양부(兩府)[3]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도록 요구한다.[4]
| 전임 이서 | 제4대영의정부사 1403년음력 7월 16일 ~1405년음력 1월 15일 | 후임 성석린 |
| 전임 초대 | 제1대조선의문하우시중 1392년7월 28일 -1392년12월 13일 | 후임 김사형 |
| 전임 초대 | 제1대조선의문하좌정승 1394년8월 -1399년12월 1일 | 후임 심덕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