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듬해1897년덕수궁으로 환궁하여, 10월 12일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연호를광무로 정하고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고종 황제는광무개혁을 실시하여 신식군대를 창설하고이범윤을간도 관리사로 파견하였으며, 근대적 상공업을 진흥하고 공장과 은행 및 회사를 설립하였고, 발전소를 건설하여 전등을 켜고 전화를 개설하고 철도를 개통하여 전차를 운행했다. 또한 신교육을 보급하고 해외 유학생을 파견하였으며, 전국의 토지 측량을 실시하고 모든 관리들에게양복을 입도록 하고단발령을 재개하는 등 근대적 개혁을 실시하였다.
일제강점기를 맞아 고종은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되어덕수궁에 머물면서대한독립의군부 등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했다.1919년 1월 21일 고종은 식혜를 마시고 갑자기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승하하였는데, 이빨이 모두 빠지고 혀가 닳아 없어지며 몸이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이에 고종 독살설이 퍼지며 3월 1일 고종 장례식을 계기로 전국에3·1 운동이 발발했다. 4월 11일상하이에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고종이 만든 '대한'을 국호로 사용하고태극기를 국기로 정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임시헌법에서 대한민국이 대한제국의 영토를 계승하고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명시하였다.
한성부 안국방운현궁 사저에서흥선군 이하응과 부인여흥 민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휘는희(㷩)[2], 초명은 재황(載晃),아명은 명복(命福), 초자(初字)는 명부(明夫)이다. 재위 중의 연호는개국,건양,광무이다. 호는 주연(珠淵)이다.[3]
아버지흥선군은남연군의 넷째 아들이며, 남연군은 본래인조의 셋째 아들인인평대군의 6대손이지만,사도세자의 셋째 아들인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따라서 남연군은영조의 법적 증손자가 되어순조와 동항렬이 되었으며,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익종과 동항렬이 되고 고종은헌종과 동항렬이 되었다.
정조의 증손자헌종이 후손없이 사망하자 직계후손이 끊어져서 방계가문인철종으로 보위가 이어졌다. 그러나1863년(철종 14) 12월 8일(양력 1864년 1월 4일), 철종 역시 후계없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권은 철종의 4촌인익평군의 아들과 철종의 호적상 6촌인흥선군의 아들들로 압축되었다. 철종의 아들들은 전부 요절했으므로 흥선군은 익종 비신정왕후 조씨를 자주 찾아 친분을 쌓고 그에게 자신의 아들들 중 한 명을익종의 양자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왕위 계승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철종 사후 흥선군과대왕대비 조씨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 재황을익종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益成君)의 군호를 내리고 12월 13일(양력 1864년 1월 4일)에 왕으로 즉위시켰다. 왕(고종)이 11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대왕대비 조씨가수렴청정을 하였고, 흥선군이대원군이 되어 집권하였는데, 조선 역사상 국왕의 생부가 생존하여 통치하는 전례 없는 일이 발생했다.
국왕의 생부로서 섭정한흥선대원군은안동 김씨를 비롯한 벌열들을 가급적 권력에서 배제하고 남인과 북인들을 등용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 최대의 정치기구로서 의정부의 역할을 대신하던비변사를 폐지하였다.의정부와삼군부를 부활시켜 비변사에 집중되어 있던 정치, 군사적 기능을 양분하였다.
대원군은붕당의 근거지로 오랫동안 면세의 특권을 누리며 온갖 폐단을 일삼던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여 정리하였으며,임진왜란 때 조선에 군대를 파병한명나라만력제의 사당인만동묘를 철폐하였는데,최익현을 비롯한 유생들의 반발을 샀다. 대원군은 서원 철폐와 관련하여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하며서원 철폐의 강한 의지를 내비치었다.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회복을 위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된경복궁을 중건하였는데 이 과정에서당백전을 발행하여 물가상승을 초래하고,원납전이라는 이름으로 강제성을 띤 기부금을 징수하였으며, 양반 소유 선산의 묘지림을 벌목하고, 도성 통행세를 거두고 백성에게 노역을 부과하였으므로, 백성과 양반 모두의 반발을 샀다. 이러한 대원군의 정책은 양반과 유생들의 격렬한 반감을 사게 되어 훗날 실각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미국 상선인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며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평양 주민에 대한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자, 평양 지역민과평안도 감사박규수에 의해 선박이 불타고 선원들이 모두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5년후인 1871년에 발생하는신미양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871년(고종 8년),미국은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아시아 함대 사령관존 로저스의 지휘 아래 강화도를 침략하였다. 미군은초지진과덕진진,광성보를 연이어 공격하였는데어재연이 광성보에서 전사하고 미군은 승전의 의미로 '수(帥)자기'를 탈취하였다. 미군이 탈취한 수자기는 현재 장기대여 형식으로 반환되었다.
척화비
이 시기 서양 제국과의 일련의 사건을 겪은 고종과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척화비를 세워통상수교거부 의지를 천명하였다.
1869년1월 31일왕정 복고의 사실을 알리는일본 제국의 사절단이 조선 동래에 도착하였다. 이때 조선 측은 사절 대표가 일방적으로 관직과 호칭을 바꾼 점, 조선이 준 도서(圖書)가 아닌 일본 정부가 새로 만든 도장(圖章)을 사용한 점, 황제란 용어를 사용한 점 등을 문제 삼아서계를 접수하지 않았다.
1872년(고종 9년) 음력 1월 일본 사절단이 3년 동안 기다리다가 동래에서 철수한다. 그 뒤 일본 외무성은1873년(고종 10년) 음력 2월 대마번에 대(對)조선 외교를 관할케 하는 관행을 폐지하고,왜관의 명칭을 무단으로 “대일본국공사관”이라고 바꾼다. 이를 “일본 외무성의 왜관 점령 사건”이라 부르기도 하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정식으로 단절된다.
1873년(고종 10년) 양력 5월 일본에서 즉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정한론을 주장하는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관료가 실각하고, 또한 조선에서는 그해 음력 12월에최익현의 탄핵 상소로 말미암아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비로소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으나여흥 민씨에 의한척신 정치가 시작되었다.
1875년(고종 12년) 3월부터 고종의 어명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국교 수립에 나선다. 그러나 일본은 사신 억류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을 끈다. 같은 해9월 20일 일본은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압박하고,1876년2월 27일 조선과 일본 양국간에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된다.[4]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영토 주권과 사법주권이 무시된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의 결과부산(1876년),원산(1880년),인천(1883년)이 차례로 개항되었다.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 정부는 세계 정세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개화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에 따라 내정개혁을 실시하였다. 고종은 군제개혁에 관심을 기울여, 과거의 구식 군대인5군영을무위영(武衛營)과장어영(壯禦營)의 양영(兩營)으로 개편하고, 일본식 군제를 도입하여 교육받은 신식군대인별기군을 조직하였다. 또 진신 자제(搢紳子弟)의 연소하고 총민한 자를 골라 사관생도라 하고 신식 무예를 연마하게 하였다.
또한 행정기구의 개혁에 착수하여 청나라 정부의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사대(事大)·교린(交隣)·군무(軍務)·변정(邊政)·통상 등 12사(司)를 두어 각기 사무를 나누어 보게 하였다.
한편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유생들의위정척사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대원군 집권기부터 서양과의 통상 반대와 척화주전론이 제기되었는데, 대원군의 대외 정책과 맞물렸다. 하지만 대원군이 하야하고 정부가 개항과 개화정책을 실시하자, 최익현과 유인석 등의 유생들이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과 개항불가론을 제기하였다.
1880년(고종 17년), 2차수신사로일본을 방문한김홍집이 일본주재 청나라 공사황준셴이 쓴 외교서인 <조선책략>을 갖고 들어왔는데,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 일본, 미국 3국과의 유대관계를 공고히 할 것을 강조하였다. 고종은 미국과의 수교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자 이에 유생들이 반발하여이만손과홍재학 등이만인소와척화상소를 올려 개화정책을 반대하고, 책을 들여온 김홍집을 처형할 것을 요구하였다.
1882년(고종 19년) 6월, 신식군대인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13개월 간 급료를 받지 못한 구식 군대의 군인들의 불만으로임오군란이 발발하였는데, 이러한 군란을 초래한 원흉으로민씨 척족과명성황후가 지목되었고, 구식 군인들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궁궐을 침범하여 왕비를 색출하였으나 명성황후는 이미장호원으로 피신하였다.
구식 군인들의 추대로 정계를 떠나있던흥선대원군이 10년만에 재집권하였다. 흥선대원군은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선포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은청나라톈진으로 압송된다. 청나라 군대의 도움으로 고종과 명성황후는 복권하였다. 이후 청나라는 고문관을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였는데,마젠창과위안스카이, 독일인묄렌도르프 등이 파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청나라와 일본의 양국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게 되었고, 일본 공사관에 경비병이 주둔하게 되었으며 일본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제물포조약)
또한 청나라와 무역장정을 체결하여, 청나라 상인의 통상권과치외법권을 인정하였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1885년,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던영국 군함 세 척이거문도를불법 점령하였다. 영국군은 섬 안에 포대를 구축하고 병영을 설치하였으며 섬의 이름을 포트해필턴이라 명명하고 영국 국기를 게양하였다. 이들은 청나라의 중재로 1887년 철수하였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유길준과 독일 부영사 부들러가 한반도를 중립지대로 하자는 조선 중립화론을 주장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1886년 사노비의 세습을 폐지하였다. 최초의 공립학교인육영공원과, 선교사가 세운이화학당이 이해에 개교하였다. 1887년 경복궁 내에 전등이 가설되었다.
동학 교도들은 수차례에 걸쳐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는데, 동학의 창시자로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된최제우를 신원할것과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이 연대하였다.
1894년 4월,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되고,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시작된 농민봉기가 거대화되었다. 동학농민군은5월 31일 전주성에 무혈입성하여 점령하였다.[5] 이에 위기를 느낀 조선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6월1일,청나라에 군대를 파병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6]6월 6일, 청나라 군대 1500명이아산만을 통하여 조선에 들어왔는데,[6] 9년전인 1885년 청나라와 일본 양국이 맺은톈진조약의 내용에 의거하여, 이틀 후인6월 8일,일본 또한 인천항을 통해 군대를 파병하였다. 파병 요청을 하지도 않은 일본군이 조선으로 들어오자,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정부는 6월 11일 서둘러농민군과 화약을 맺고,[7][8] 청일 양국에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8]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한후 각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였다.[9]
하지만 일본은 조선의 철수요구를 무시하고7월 23일, 군대를 앞세워 경복궁을 점령하고 왕궁을 포위하였다. 이어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였다.김홍집을 비롯한 중도 개화파를 중심으로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은 일본공사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5개조 개혁안의 제출로 시작되었는데, 조선 정부는교정청(校正廳)에서 독자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하였다. 이후 개혁안을 발표하여 전근대적인 제도를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법제화하였는데, 역사 이래 지속된신분제도가 형식적으로 폐지되었다.
7월 25일, 일본은 청나라에 국교 단절을 통보하고 선전포고를 함으로써,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청일전쟁의 전장터는 조선이었다. 충청도와 황해도, 평안도 등이 청나라-일본 양국군대의 전장터가 되었고, 남부지방은 농민군과의 국지적 교전이 계속되어 한반도 전체가 전쟁터가 되었다.
고종과명성황후는 이 사태를 주시하고,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의 힘을 이용하려고 하였다.[10] 이에 따라1895년 8월 25일, 친러 성향의 제3차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는데 조선 내에서 러시아의 세력확장을 견제하던 일본은, 친러시아적 성향의 명성황후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주한일본공사미우라 고로(三浦梧楼)의 지휘아래,1895년10월 8일, 경복궁 내건청궁 곤녕합 옥호루를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하였다. 일본인 낭인과,조선인 협력자[11]들에 의해 왕비가 제거되고 고종과 왕세자는 덕수궁에 감금되었다.
1896년2월 11일, 고종은 당시 친러파였던이완용 등의 종용과,을미사변으로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있던 찰나, 왕태자 척(순종)과 함께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13] 이때왕태자비 민씨는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직후에 고종은 을미 4적으로김홍집,유길준,정병하,조희연을 거론하여 이들과 법부대신 장박을 포함한 다섯대신을 잡아 죽일것을 지시했다.[14] 이로 말미암아 김홍집, 어윤중, 정병하는 피살되었고 유길준, 장박, 조희연은 일본으로 망명하여[15] 사실상김홍집 내각은 붕괴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주필(駐蹕)한 고종은 경복궁 및 경운궁을 오가면서경운궁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개조사업을 명한다.1896년9월 29일 조칙(내부령 제9호)을 내려 도시 개조 사업을 한성 판윤이채연과 총세무사맥레비 브라운에게 시행토록 한다. 그에 따라독립문 건립을독립협회로 하여금 추진토록 한다.
그리고 종래의 경복궁과 운종가 중심의 도로 체계 대신에 경운궁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상 도로와 환상 도로 및 그 외접 도로를 새로 개통하였으며, 기존 도로를 정비한다. 또한 경운궁 앞은 백성들이 집회를 열 수 있도록 광장을 마련했는데, 이는 현재의서울광장 위치이다. 이 시기에 시민공원 또는 시민광장도 등장했는데,탑골공원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4]
대한제국 고종 황제선글라스를 착용한 고종고종이 황제로 즉위할 때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환구단
1897년(건양 2년)9월 29일 치사 봉조하(致仕奉朝賀) 김재현(金在顯), 정1품 이호준(李鎬俊) 등 조정 관원이 황제 칭호를 사용할 것을 청하는 연명 상소를 올렸다.
아관파천 이후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열강의 이권 각축 경향을 보였으나, 고종은1897년경성경운궁으로 환궁하여환구단(황제로 즉위)을 지었다. 그리고 그해10월 13일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낸 후에 국호를대한제국, 연호를광무(光武)로 새로 정하고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어 조령을 내렸다.
“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단군과기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고려 때에 이르러서마한,진한,변한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우리태조(太祖)께서 왕위에 오르신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말갈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남쪽으로는탐라국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上帝)께서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와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백악산(白嶽山)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 해를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으며,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王后)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아! 애당초 임금이 된 것은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고, 황제의 칭호를 선포한 것은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에 부합한 것이다.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며 교화를 시행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려고 하니, 세상에 선포하여 모두 듣고 알게 하라.
”
— 고종실록 광무 1년(고종 34년) 10월 13일
대한제국 선포 이후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서재필 등이독립 협회를 창단하여 대한 독립의 공고화와입헌군주제의 수립을 호소했으나,[16] 조정의 보수 대신들이 지원하는황국협회가 새로이 결성되어 양측은 노골적으로 대결하였다. 결국 고종은 두 단체를 군대로 하여금 모두 무력으로 강제 해산시키고 정국은 다시 소강 상태가 되었다.1899년노면전차를 도입하였다.
고종 황제의 깃발인 《대한황제폐하몸기》
이것을 고종이 신문물에 대해 넓은 이해와 포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4][17] 그러나윤웅렬,유길준,윤치호 같은 이들은 대한제국 선포에 회의적이었다. 단순히 “국호만 바꾸고 칭제건원을 한다 하여 조선의 국왕에게 없던 용기가 생겨나거나 국격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구본신참의 기치 하에광무개혁을 실시하였다. 정치적으로는전제군주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며대한국 국제를 선포하여 교전소와 법규 교정소를 설치하고 시위대와 진위대의 증강을 통해 국방력을 강화하고자원수부를 설치하였다. 그는 직접 대원수가 되어 육해군 통솔하게 되었고, 황태자를 원수에 임명하였다.[18]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독립협회가 하였고,조병식과 같은 수구파 인사들의 모함으로 독립협회가 해산되는 결과를 낳았다.[19]
1898년8월 2일 고종에게 앙심을 품은 러시아 담당 역관김홍륙이 고종이커피 애호가라는 점을 이용해 커피에 독극물(아편)을 타서 대접했다. 고종은 김홍륙이 대접한 커피를 엄청나게 이상하다고 판단해서 마시지 않고 커피를 땅에 부었다. 하지만 이 커피를 마신 고종의 아들순종은 치아가 모두 결손되어 어린 나이에틀니를 착용하게 되는 등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종은김홍륙을 체포한 후1898년10월 10일 부로교수했으며 김홍륙의 구족을 멸하고 그 일당들을 거의 토벌 수준으로 처리했다. 이는 당연한 것으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국의국왕을 시해하려고 한 죄는 한 나라에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이기 때문이다.
1899년 조카이준용은 직접 쿠데타를 기획하였다. 이전까지의 쿠데타가동학 농민군이나 할아버지흥선대원군에 의해 추진된 것이라면 이번 쿠데타에 이준용 본인이 직접 기획하고 사전 준비까지 한 것이었다. 그 해에는 이준용 추대 관련 역모가 3건이 적발되었다.
이준용이 일본에서 다시 활동을 개시할 때 쯤에 벌어진장윤상 발언 사건과어용선 사건은 고종을 자극하기 충분했다.[20] 전참봉장윤상이 자신이 일본에서 이준용을 모셨다고 하면서 1899년 1월 이준용이 귀국하면 고종 대신 국왕이 되거나 대통령에 오를 것이라고 말하였다.[20] 이는 와전되어 "박영효가 반역하여 이준용을 추대하고 고종을 태상왕으로 만들 것이라"는 소문으로 번져나갔다. 이에 4월 12일 소문의 발원자인장윤상은 교형에 처해졌고, 그 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이유로 유학신현표와 전 순검 이지현은 태 1백 대에 종신형을 선고받았다.[20]
반정부 인사들이 이준용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소문이나 움직임은 고종에게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장윤상 사건과 어용선 사건이 처리된 직후인 1899년 6월 고종을 폐위하고 이준용의 옹립을 기도했다는 고발에 따라 윤태영 등 3인이 체포되었는데[21][23], 이는 고종 정부가 이준용 추대 모의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1900년안경수,권형진을 처형 직전 양인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1894년7월에 이준용이 명성황후와 세자궁을 처단하려 하였고, 이러한 역모 사건은 결국을미사변으로 이어졌다는 진술이 나왔다.[24] 이에 고종 정부의 고관들인김성근,신기선,조병식,윤용선, 민종묵 등과 재야의 유생들은 1900년 6월부터 역모를 자행한 이준용을 일본에서 불러다가 처형하자는 상소를 되풀이하여 올렸다.[25] 그러나 고종은 그 때마다 윤허하지 않았다.
일본 망명 직후부터 이준용은귀인 엄씨의 빈 책봉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어 고종은명성황후의 빈자리를 대체할 인물로 엄상궁을 택하고 그녀를 황후로 격상시키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를 접한 이준용은 망명 한인들에게 이를 알리며 반대 운동을 준비한다.
1899년4월 이준용은 일본망명객들이 벌인 엄상궁의 왕비책봉에 대한 반대운동에 가담하였다.[28] 그는유길준,권동진,조중응 및 기타 2~3인과 함께 논의한 결과 신분이 낮은 엄상궁을 왕후로 삼는 것은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조치라는 이유를 들어 엄상궁의 왕후 책봉을 반대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의사를 담아궁내부대신이재순에게 충고서를 보내기로 하였다.[28]
또한 이준용은 아버지흥친왕에게 서한을 보내 “엄상궁 같은 미천한 소생이 국왕의 총애를 얻은 것을 기화로 간신배들이 벼슬을 얻기 위해 엄상궁을 왕비로 책봉하려 기도하고 있으니, 이러한 때에 왕실에 관계된 이들은 반대의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준용이엄상궁의 왕비 책봉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인 것은[28] 엄상궁이 자신의 아들 황자 이은의 권력 승계를 위해 일본에 망명 중인 이준용과의친왕 등을 극력 배척하였기 때문이다.[21] 그러나 이런 처지에서 이준용의 엄상궁 왕비 책봉 반대운동은 도리어 그의 신변에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21]
엄상궁과 그의 측근들은 고종에게 이준용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고했고, 명성황후의 암살에 이준용이 개입되었다고 확신하던 고종은 이준용 제거를 결심한다. 그러나 일본정부에서는 정치 망명객이라는 이유로 이준용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고 고종은 밀지를 내려 자객들을 일본 도쿄 부로 파견했지만 실패한다. 이준용 역시 양돼지라는 별명과 달리 거구에 비교해서 상당히 민첩하게 움직였고 무예 실력까지 갖추고 있었으므로 고종의 이준용 제거 계획은 번번히 수포로 돌아갔다.
고종은 일본의 침탈에 대비하여1902년6월에 정보기관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를 황제 직속으로 설치하고, 국내외 정세, 고위직 및 외국인 관료, 첩자 등의 첩보를 파악한다.
1903년 5월 육군과 해군의 창설을 위한 준비를 지시한다. 군대 창설과 관련하여1903년3월 15일 징병제도 실시를 예정하는 조칙을 내렸으며, 서양의 징병제와 조선의 5위(五衛) 제도를 절충하는 군제 개혁을 예정하고 그에 따라 협력을 당부한다. 또한 1903년 시위대 1만2천(최종적으로 1만6천) 병력을 갖추고, 용산에 군부 총기제조소를 건립하였다. 이러한 군대 창설 및 그와 관련한 일련의 성과는을사조약 이후에 계획 자체가 없어지거나 성과는 철거되었고, 급기야1907년 일본군은 군대를 풀어 한양 내에 있는 주변 시내를 장악하고 군대 해산하라고 명령을 내리면서군대가 해산이 된다.[4]
고종은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한국의 황성(한양, 지금의 대한민국 서울)을 침탈하게 된다는 점을 예견하고,1903년8월 15일 고종 황제가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한다.[4] 고종은 그 뒤1904년1월 23일 대외적으로 중립국을 선포하였으나, 서울을 점령한 일본의 강요로2월 23일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1905년11월 9일 서울에 온이토 히로부미 조선통감은 다음 날인11월 10일고종 황제에게 일왕의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노니 대사의 지휘를 일종하여 조치하소서.”라는 내용의 친서를 바쳐 고종을 위협하고1905년11월 15일 다시고종 황제에게 한일협약안을 제시하면서 조약 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이 무렵, 주(駐)조선 일본 공사하야시 곤스케(林権助)와 주 조선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가 일본으로부터 증원군을 파송받아 궁궐[30] 내외에 물샐 틈 없는 경계망을 펴고 포위함으로써대한제국 황궁은 공포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고종 황제는 통감의 집요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조약 승인을 거부하였다. 이에 일본은 전략을 바꾸어 조정 대신들을 상대로 위협·매수에 나섰다.
11월 11일하야시 곤스케는 외부대신박제순을 주대한제국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조약 체결을 강박하고, 같은 시간 통감은 모든 대신과 원로대신심상훈(沈相薰)을 그의 숙소로 불러 조약 체결에 찬성하도록 회유와 강압을 되풀이하였다.
이러한 회유와 강압 끝에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된 통감과 하야시 곤스케는 마침내11월 17일경운궁에서 어전회의를 열도록 했다. 그러나 회의는 침통한 공기만 감돌았을 뿐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고종황제는 강압에 의한 조약 체결을 피할 목적으로 의견의 개진 없이 대신들에게 결정을 위임한 상태였다. 어전회의가 5시간이 지나도록 결론에 이르지 않자 초조해진 통감은 하세가와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일본헌병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궐내로 들어가 노골적으로 협력에 동의하라고 고종에게 강요 및 협박을 했다.
고종은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통감을 달래어 내보냈다. 그는 직접 메모용지에 연필을 들고 대신들에게 가부(可否)를 따져 물었다. 그때 갑자기 한규설 참정 대신이 소리 높여 통곡을 하기 시작했던지라 별실로 데리고 갔는데, 그가 “너무 떼를 쓰거든 죽여 버리라.”라고 고함을 쳤다.[31] 참정대신한규설, 탁지부대신민영기, 법부대신이하영만이 무조건 불가(不可)를 썼고, 학부대신이완용, 군부대신이근택, 내부대신이지용, 외부대신박제순, 농상공부대신권중현은 책임을 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의를 표시하였다. 이 찬성한 다섯 명을을사오적이라 한다.
통감은 각료 8대신 가운데 5대신이 찬성하였으니 조약 안건은 가결되었다고 선언하고 궁내대신이재극을 통해 그날 밤 황제의 칙재(勅裁)를 강요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짜로 외부대신박제순과 일본 공사하야시 곤스케 간에 이른바 이 협약의 정식 명칭인 ‘한일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32]
조약의 체결은 한국 내에서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각계 각층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였다.장지연은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 날을 목놓아 통곡한다)〉을 게재하였고,민영환은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등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윤치호는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을사늑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 또한 늑약에 대한 반발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내정이 잘 다스려지지 않아 하소연할 데 없는 백성들이 모두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졌고
외교를 잘못하여 조약을 체결한 나라와 동등한 지위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폐하께서 하찮은 소인들에게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입니다.
궁실을 꾸미는 데 힘쓰게 되니 토목 공사가 그치지 않았고, 기도하는 일에 미혹되니 무당의 술수가 번성하였습니다.
충실하고 어진 사람들이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니 아첨하는 무리들이 염치없이 조정에 가득 찼고,
상하가 잇속만을 추구하니 가렴주구 하는 무리들이 만족할 줄을 모른 채 고을에 널렸습니다.
개인 창고는 차고 넘치는데 국고(國庫)는 고갈되었으며 악화(惡貨)가 함부로 주조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그리하여 두 이웃 나라가 전쟁을 일으키고 우리나라에 물자를 자뢰하니
온 나라가 입은 피해는 실로 우리의 탓이었습니다.
심지어 최근 새 조약을 강제로 청한 데 대하여 벼슬자리를 잃을까 걱정하는 무리들이
끝끝내 거절하지 않고 머리를 굽실거리며 따랐기 때문에
조정과 재야에 울분이 끓고 상소들을 올려 누누이 호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로 일치된 충성심과 애국심은 어두운 거리에 빛나는 해나 별과 같고 홍수에 버티는 돌기둥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지난날의 조약을 도로 회수해 없애버릴 방도가 있다면 누가 죽기를 맹세하고 다투어 나아가지 않겠습니까마는,
지금의 내정과 지금의 외교를 보면 어찌 상심해서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지금이라도 든든히 가다듬고 실심으로 개혁하지 않는다면
종묘사직과 백성들은 필경 오늘날의 위태로운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독립의 길은 자강(自強)에 있고 자강의 길은 내정을 닦고 외교를 미덥게 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의 급선무는 일을 그르친 무리들을 내쫓음으로써 민심을 위로하고
공명정대한 사람들을 조정에 불러들여 빨리 치안을 도모하며,
토목 공사를 정지하고 간사한 무당들을 내쫓으며 궁방(宮房)의 사재 축적을 엄하게 징계하고
궁인(宮人)들의 청탁으로 벼슬길에 나서게 되는 일이 없게 할 것입니다.
자강의 방도와 독립의 기초가 여기에 연유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힘쓰고 힘쓰소서. — 《고종실록》 대한 광무 9년(1905년 12월 1일) 기사
그러나 고종은윤치호의 상소에 내심 동의하면서도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12월 내내한성부를 왕래하며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 전단지를 배포했다. 이후강원도삼척군과울진군에서 을사조약 무효 선언과 동시에 의병이 일어났고 쇠퇴해가던 의병 활동에 불을 지피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와 같은 반대 운동에 힘을 얻은 고종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한다.
영국에 전달된 제2차 한일 협약이 무효임을 알리는 고종의 친서
이후 고종은 제2차 한일 협약 체결의 부당함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당시 국제 정세의 논리에 따라 황제의 밀서 등은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고종의 을사체약 무효선언서는1906년1월 29일에 작성된 국서,1906년6월 22일에호머 헐버트 특별위원에게 건넨 친서,1906년6월 22일에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1907년4월 20일 헤이그 특사이상설에게 준 황제의 위임장 등이 있다.[33] 고종의 무효선언 발표는 훗날대한민국에서을사조약의 무효, 불법성을 주장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었다.
조약 체결 당시부터 국제법학계의 일부 학자들은 을사조약은 무효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특히 프랑스 국제법학자 레이는 제2차 한일 협약 체결 당시 강박(強迫)이 사용된 점과 고종이 그 조약이 불법이고 무효인 점을 밝히기 위해 즉각 항의외교를 벌인 점을 들어 ‘1905년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했다.[34]
훗날 고종의 무효선언서의 존재를 확인한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에 수교하는 조건으로 을사조약 무효, 파기를 요구한다. 대한민국과 일본은1965년한일기본조약에서 을사조약(제2차 한일 협약)을 포함하여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한 번 더 확인하였다.[35] 후일 정상수명지대 교수는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나타내는 독일어 전보를 발견하였다.[36]
1907년 4월, 고종은네덜란드헤이그에서 열리는만국평화회의에이준,이상설,이위종 등 특사와호머 헐버트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고자 하였다. 이 사건을 두고 일본은 고종에게 퇴위할 것을 강요하였다.일본의 압력으로 고종은 1907년 음력 7월 20일, 황태자에게 양위하였으나 양위를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가 불참하는 기이한 양위식이 거행되었다.
고종은1919년1월 21일 오전 6시경덕수궁함녕전에서 68세로 사망했다. 고종의 공식적 사인은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로 인한 자연사이지만, 아직까지 고종의 사망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었고,3 · 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묘소는홍릉이다.
고종의 석연치 않은 죽음을 두고 독살설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무관 출신한진창은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하였다.[37] 그리고한진창은 자신의 누나 한진숙의 시조카윤치호에게 고종이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37]1919년 초까지만 해도윤치호는고종 독살설에 부정적이었다.
윤치호는한진창 역시 고종독살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었는데,민영휘, 나세환, 강석호(내관) 등과 함께 시신의 염을 한 민영달이 한진창에게 이 내용들을 말해주었다고 하였다.[37]
한편 일본궁내성 제실회계심사국 장관인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의 일기에 의하면 고종이 조선 독립운동과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일본 수뇌부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적고 있다.1919년에 개최되는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합병의 부당함을 호소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고종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데라우치 총독이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고종으로 하여금 1905년의을사늑약이 유효했음을 확인하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거절하여 독살하였다는 일본 정계의 풍문을 일기에 기록하였다. 또한 이시하라 겐조(石原健三)와 다나카 우쓰루(田中遷)와 같은 관료들에게 고종 독살에 대한 풍문을 묻기도 하였다.[38]
이문용(李文鎔)은 스스로를 고종과 상궁 염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녀라고 주장한 인물로, 이에 관해서는 검증된 바가 없으며 관련 기록도 전무하다. 소설가 유주현이 이문용을 고종의 딸로 묘사한 장편소설 《황녀》를 발표하고, 1974년 같은 제목의 MBC 일일드라마가 방영되면서 황녀 여부에 대한 진위 논란이 일었다. 드라마 때문에 황녀로 알려지자 1975년부터 전주경기전 내 조경묘 수직사에서 기거하다가 1987년 3월 28일에 사망하였다. 황실 구성원들과전주이씨대동종약원은 왕실 족보 《선원계보기략》과 《승정원일기》에서조차 기록이 없는 이문용을 고종의 친딸이 아니라고 부정하였고, 당시까지 생존하여 있던 상궁도 이문용의 존재를 부정하였다.[51]
고종 황제를 직접 만나본 외국인들은 대체로 고종의 해박한 지식과 과감한정치 감각에 호의를 보였다.[52]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는 “고종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수동적으로 대처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극심한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고종이 민비 일가에게 끌려 다녔다는 그간의 평가와는 대조를 이룬다.[4]
스워터트는 미국인데니(O. Denny)[53] 가 남긴 평가, 즉 “고종은 위대한 국가의 지배자다운 강건, 낙관 및 인내를 보였다.”라는 평가를 지지하면서, 위 해링턴 연구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데니는 본래이홍장이 자신의 조선 속방화 정책을 조력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조선 정부에 추천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고종의 고문이 된 데니는 자신의 나라를 독립국으로 보존하려는 개군주의 노력에 감동하여 오히려 청나라에 대해 조선을 변호하는 일을 업무로 삼아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그의 특별한 이력은 조선의 평가 자체에 대해 신뢰성을 더해 준다. 그리고 고종이 고빙한 서양인 고문중 한 사람이자 개신교 선교사였던헐버트(Homer Hulbert)는 고종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강하게 부정하였다. 그는 황제가 “유약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견해는 틀렸다.”면서 고종이 주권 수호에 대한 확고한 의지 아래 사생결단의 조치를 단행했던 것들을 열거하였다.[4]
또한1895년에한성신문 기자로서을미사변에 직접 가해자로 참여하기도 했던기쿠치 겐조(菊池謙讓)가 쓴 《근대조선사》 상·하(1936년,1939년, 鷄鳴社, 京城)에서 상당히 다른 의견을 보이고 있다. 기쿠치는 《근대조선사》를 쓰기에 앞서조선사편수회에서 편찬한 《고종태황제실록》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자료를 모으게 된다. 그의 논조는 대체로 《코리아 레퍼지터리》와 유사하여, 고종이 암군이 아닌 명군이었으며, 단지 열강에 포위되어 내정보다는외교에 힘쓰다가 국세를 끝내 세우지 못한 불운한 군주라고 묘사하였다. 또한 기쿠치는 다른 일본 학자가 거론하지 않은 평양 이궁 조영(造營)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며, 그러한 고종의 치적을제정 러시아와일본의 사이가 나빠짐에 대비한 시책이라고 평가하였다.1903년8월 15일 고종 황제가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는데, 그 친서에는 일본이황성을 침탈하게 됨을 고종이 이미 예측하였음이 밝혀져 있고, 이러한 동맹 요청을 평양 이궁 조영의 연장으로 보았다. 그밖에도 고종 시기에 설치된 각종 근대적 기구나 받아들여진 서양 문물을개화파나독립협회의 치적으로 보지 않고 고종의 업적으로 평가하였으며, 오히려 일본에 합병됨으로써 결실을 보지 못하고 산멸했다고 보았다.[4]
고종에 대한 서양인의 평가[54]는1896년10월에 간행된 《코리언 레퍼지터리》 3권 11책에 실린 〈한국의 국왕 폐하〉(His Majesty, The King of Korea)의 글이 가장 자세하다. 그 글에서아관파천을 단행하여일본으로부터 벗어난 뒤,대한제국으로의 새로운 출범을 내다보면서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그것도 서양인들(코리언 레퍼지터리잡지의편집자들)의 시점에 따라 씌었기 때문에 객관성이 인정된다. 그들이 특별히 한국의 국왕에게 아첨을 떨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고종의교육 수준에 대해 폐하는한문과한글에 숙달하여 있다고 하였고, 국왕 자신이 자기 나라의 역사에 대해 나라 안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으며, 신하들이 잘 모르고 있는 전통 등에 대해 국왕에게 물으며 그가 답해 주기도 한다고 적혀 있다. 국왕의 집무에 대해서도 매우 부지런하며,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해낸다고 평을 하였다.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도 호평하여,진보적이며 또한 다른동양 나라와는 달리서양에 대해 적대적인 생각에 젖어 있지 않으며,교육적인 일에 아주 관심이 많으며, 그리고 최근 수년 안에 이런 진보적 방향에서 물질적인 진보들이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종교 면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탄압했던) 대원군 집권 때와는 달리 관용으로 일관하였다. 국왕의 성격에 대해서는 친절하고 상냥하며 자비롭다고 말하면서 기자는 진실로 그의 나라의 복지와 진보를 열망하고 있다고 적었다.[54]
1883년 조선에 진주한위안 스카이는 고종을 '혼군'이라 칭하면서 폐위를 주장하고 나선다. 조선 정부관료 스무명을 일거에 자신의 측근으로 갈아치웠다.[55]
미국의 언론인데넷 타일러(Dennett Tyler)의 견해는 부정적이다. 그는1905년 황제와 조정 관료의을사조약 무효화 운동 때11월 25일자로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루트(Root) 국무장관에게 보낸 서신과 12월 19일 루트가 민영찬 공사에게 보낸 회신 등을 근거로, 루스벨트나 루스는 “한 점 잘못 없이” 객관적 사실에 의거하여 합당한 외교 조치를 취하였다고 평가하면서, 잘못은 오히려 고종 측에 있다고 단정하였다. 심지어 “대한제국이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루스벨트에게 배신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황제에 의해 배신당했다.”라고 극언하였다. 그의 견해는 고종의 인물평이라기보다 업무 능력에 대한 평가이지만, 1920년대에 제기되어 그 이후의 부정적 견해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4]
즉위 초반에는 아버지인흥선대원군에 의해, 즉위 중반에는명성황후와 민씨 일족에 의해 국정이 좌지우지되는 것과 즉위 후반에는 명성황후가일본 제국과러시아 제국을 끌어들이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때 그의 신하였던윤치호는 '용모가 상당히 출중했다.[56]'라는 평을 내렸다. 그러나윤치호는 그를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매력적이지만 공인으로서는 신망을 얻지 못한 점에서영국의찰스 1세와 유사하다.[56]'고 평가했다.윤치호는 자신의윤치호 일기에서조선은유교 국가인데 그런 나라의 임금이면서도 고종은 아버지흥선대원군의 임종은커녕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며,유교적 기준에 의하면 고종은 패륜을 저지른 왕이라며 조롱하기도 했다.
또한 권력의 부패는 민중의 저항을 야기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명성황후는 죽을 위기를 넘겨 장호원으로 피신하게 되고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대원군 덕분에 권력을 행사하기 어렵게 된 고종이나 명성황후의 입장에서는 이 현상을 타개할 묘안을 찾아야 했고, 명성황후는 은밀한 서한을 고종에게 보냈다. 청나라 군대의 파병 요청이 그것이었다. 남의 나라 군대를 빌려 국내의 권력다툼을 해결하고자 했던 장본인이 바로 이 고종과 명성황후였고, 그 뒤 외세가 툭하면 군사력을 동원해 우리를 협박한 빌미를 제공한 것도 이들이었다.
청나라 군대 때문에 다시 권력을 되찾게 된 고종과 민씨 척족들이 한동안 친일적이던 외교정책을 친청으로 바꿀 것은 당연했다. 갑신정변 실패 뒤 청국은 원세개를 보내 조선을 속국처럼 다루었다. 아무리 고종이 청나라에 기대 권력을 유지하는 처지지만 청에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나 미국을 끌어들여 청을 견제하려 했으나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나름대로 자주적 외교정책을 내세웠다는 평가가 가능할 정도로 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 자주적 외교정책은 국권의 확보를 위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조선에서 고종 자신보다 더한 권력을 휘두르는 청과 감국으로 파견된 원세개에 대한 반발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왕권에 대한 외세의 침해가 일차적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농민전쟁에 대응하는 고종의 태도에서도 확인된다.“청나라 병사로 막아내자.”[57]
윤치호가 판단하기에 다른 사람들도 황제를 혐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즉,윤치호는 사람들은 황제를 “너무나 증오해서 그를 망신 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환영하는 것 같다. 그가 왕좌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사람들의 혐오감이나 정의감을 만족시킬 것 같다.”고 보았다.[58]
해링턴(Harrington)은 한국 최초의 외국인어의이자 미국개신교회선교사였던호러스 뉴턴 알렌이톨레도에서 쓴1903년10월 14일자일기를 근거로 삼아 고종을 “유약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해링턴의 의견은1903년10월 14일자 일기 내용은 그저 알렌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으리라는 내용이었을 뿐, 모든 분야에서 유약하다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는 데에서 정확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알렌이 고종에 대해 쓴 다른 날짜의 일기, 예를 들면1885년2월 3일(화요일)(1884년 음력 12월 19일)자 일기에서도 “대단히진보적인 조치”(This is a very advanced step)라고 하거나,1886년 양력9월 11일(토요일)자일기에서 “국왕은 어리석은 바보가 아니다.”(The King is no fool)라고 하였지만 해링턴은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4]
영국의 지리학자인이사벨라 버드 비숍은개신교 선교사언더우드 부인의 주선으로경복궁에서 고종 황제를 알현하는 모습을 기록하면서, “조선의 왕은 온화한 성품으로 유명하며, 성실하고 유능한 군주이지만 너무 착한 사람이다. 그에게 강인한 성격이 있었다면 훌륭한 통치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59]《코리언 레퍼지터리》에 실린 〈한국의 국왕 폐하〉는 현존하는 고종에 대한 외국인의 평가 가운데 가장 자세하면서도 가장 호의적이지만, 비숍의 평가 자체는 부정적이지 않지만, 일본에서 고종이 암울하고 유약한 군주였다는 소위 “고종 암약설”의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1905년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10년한일 병합 조약가 단행되었으나 그는 일본에 적극 저항하지 않았고, 망국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리고한일 병합 뒤에는 일본 황실의 황적에 편입 즉,이왕가를 창설하는 것을 스스로 받아들였고, 일본으로부터이태왕이라는 직책과일본 제국메이지 천황이 주는 은사금까지 수령했다.
유학자황현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국고를 탕진했다는 점을 수시로 비판했다. 그리고황현 자신의 저서매천야록의 곳곳에서도 이를 언급하였다. 고종과 민비는 원자가 태어나자 궁중에서는 원자의 무병장수를 기원한다는 핑계로 팔도강산에 두루 돌아다니며 제사를 지냈다. 이렇게 탕진하는 하루 비용이 천금이나 되어내수사가 소장한 것으로는 비용 지출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60] 마침내호조나선혜청에서 소장한 공금을 빌려서 사용했지만 그것이 위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1년이 채 못돼대원군이 비축해 놓은 재물을 모두 탕진했다. 그래서 매관매직이나 매과(돈을 주고 과거 합격증을 파는 일)까지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또한, 세종때 중국에 조공받치기 꺼려하여 폐쇄시킨 금광중(조선시대 광산은 세종이후 300년 동안 묻혀있었음) 세계 최고의 순도를 자랑하고 매장되어 있는 평안도 운산금광을 미국출신 왕실어의인 알렌(제중원 설립자)에게 팔아버린(금광에서 나온 금지분인 25%를 국고에도 반납 시키지 않고 자기 궁궐예산으로 전용하는 계약을 맺음, 차후 흥청망청 사용하다 궁궐예산이 바닥나자 일시불로 12,500달러를 받고 40년간 미국기업에 위임시킨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실제 이 미국기업은 일제시대에도 1939년까지 채광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음)천하의 어리석은 매국노 행위를 하였음.(영화를 보면 고종이나 민비를 사실에 기초하지 않고 너무나도 감성에 치우친 미화가 많음)이때, 운산금광을 왕실이 직접 관리하면서 알렌을 통해 미국과 조약을 굳건하게 하여 미국식 선진문물을 배우고 법을 제정하고 정부제도와 펀제를 혁신하고 군대를 신식군대로 양성하고 전국과 지방도로를 넓히고 화페개혁과 경제를 민간에게 자율적으로 상업화시키는 부국강병을 단행했으면 일본에 지배당하는 역사도 없었음) 이때문에 오로지 자기신변과 왕권강화에만 목적이 있는 참으로 어리석고 시대를 거스리고 역행한 군주와 민비를 둔 조선의 운명이었다고 볼 수 있음[60]
민영환은 고종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다. 그가 외숙 서상욱에게 군수 자리를 하나 달라고 여러 번 고종에게 아뢰었다. 고종은 “너의 외숙이 아직까지 고을살이 하나 하지 못했단 말이냐?”면서 곧 벼슬을 내릴 것처럼 이야기했다. 하지만 벼슬이 내려오지 않자, 민영환이 다시 임금에게 청했다. 임금은 광양군수 자리를 서상욱에게 하사했다. 민영환이 집에 돌아와 “오늘 임금이 외숙에게 군수 자리를 허락하셨으니, 천은이 감격스럽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가 실소하면서 “네가 이처럼 어리석고도 척리(戚里)란 말이냐? 임금이 한 자리도 은택으로 제수한 적이 있더냐? 어찌하여 너에게만 특별히 은덕이 미친단 말이냐? 내가 이미 5만냥을 바쳤단다”라고 말했다. 매천 황현은 “관찰사 자리는 10만냥~20만냥이었고, 일등 수령자리는 적어도 5만 냥 이하를 내려가지 않았다.”면서 “부임하면 빚을 갚을 도리가 없어 다투어 공전(公錢)을 낚아내어 상환하였다”고 했다.[61]
고종은 이렇게 매관매직을 하거나 원납전을 거두는 등의 방법으로 개인 비자금인내탕금을 형성하였다. 이렇게 마련된 황제의 비자금은 본래 자금을 관리하는 탁지부의 예산보다 훨씬 비대해졌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 국가 재정을 마련하는 징세 제도는광무개혁 이후에도 전혀 정비되지 않아 세수는 늘 부족하였다. 관직을 산 지방 관리나 수령, 이서배 등은 백성을 착취하여 사적으로 축재하고 정부에 납부할 세수를 중간에서 횡령하면서 재정 부족에도 일조하였다.공명첩 제도와 달리 고종은 실직을 매관매직 했다는게 문제였다. 부정부패 또한 이전보다 더 심해졌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다만, 황현의매천야록은 저잣거리의 풍문 등 근거가 확실치 않은 내용도 기록한 책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