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존수(李存秀, 1772년 6월 5일 ~ 1829년 10월 14일)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조선 중기 때좌의정을 지낸 월사이정구(李廷龜)의 7대손이며영의정이천보의 손자이다. 부친은이문원이다. 자는 성로(性老),[1] 호는 금석(金石) 또는 연유(蓮游),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교, 겸설서, 기사관, 각신에 이어 대교, 수찬을 거쳐 의정부검상, 직각, 대축을 지내고 원임직각에 이어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이후이조참의와홍문관부제학을 거쳐이조참판, 전라도관찰사에 이어 다시 홍문관부제학, 검교직제학을 거쳐 다시 경상도관찰사에 이어서이조참판과승지를 지내고, 선혜청당상과 좌부빈객을 거쳐의정부좌참찬,한성부판윤,사헌부대사헌,이조판서를 지내고, 좌부빈객에 이어사헌부대사헌,이조판서를 지내고 좌부빈객을 다시 지낸 뒤,형조판서,공조판서,예조판서,호조판서를 두루 지내고 빈전 제조에 이어사헌부대사헌을 지내고 빈궁제조에 이어,사헌부대사헌으로 빈궁당상을 겸임했다. 이후 직제학,예문관제학을 지내고 우빈객을 겸하다,병조판서,판의금부사,형조판서,한성부판윤에 이어 판의금부사를 다시 하고 함경도관찰사를 하다가홍문관제학으로 좌부빈객을 겸하고 이후호조판서를 겸하다가의정부우의정이 되고,우의정으로 서사관을 겸하다 판부사로 전직한 뒤 다시좌의정에 이르렀다. 명문 출신으로 유배 한 번 없이 벼슬길이 순탄했다.
↑〈행장(行狀)〉에는 10월 14일에 정침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정조실록》에는 10월 13일 기록에 사망 사실이 적혀 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의 문헌에는 시호를 내린 기록이 없다. 《용호한록(龍湖閒錄)》 제14책 698편 〈계해11월일시호망(癸亥十一月日諡號望)〉에 시호가 실려 있는데, 계해는 1863년이고 날짜는 미상이다. 같이 실린 김문근(金汶近)이 11월 6일에 사망하였으므로 시호가 정해진 것은 6일 이후의 11월이다. 다음달인 12월 8일에 철종이 승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