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李舜臣,1545년4월 28일(윤음력 3월 8일)~1598년12월 16일(음력 11월 19일)은조선 중기한국의 무신이다.본관은덕수(德水),자는여해(汝諧),시호는충무(忠武)이며한성 출신이다.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선조 9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종9품)을 시작으로 훈련원 봉사(종8품), 충청병사 군관, 전라도 발포진 수군만호(종4품), 훈련원 봉사(종8품), 함경남병사 군관, 훈련원 참군(정7품), 사복시 주부(종6품), 함경도 조산보 병마만호(종4품), 전라감사 조방장, 선전관, 전라도 정읍현감(종6품:태인현감 겸무),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정3품)를 거쳐 정헌대부(정2품상계) 삼도수군통제사(종2품)에 이르렀다.[2]
함경도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 1581년 발포 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가 되었다가전라남수영의 오동나무를 베기를 거절하여 좌수사 성박의 미움을 받기도 했다. 이후 1584년 남병사의 군관과 건원보권관,훈련원참군, 1586년사복시주부를 거쳐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로 부임했다. 조산만호 겸 녹둔도사의 재직 중 1587년(선조 20년)9월의여진족의 사전 기습공격으로 벌어진 녹둔도전투에서 이겼지만 피해가 커서, 북병사 이일의 탄핵을 받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는 위치에 서기도 했다. 그 뒤 두 번째 여진족과의 교전에서 승전, 복직하였다. 그 뒤전라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 선전관 등을 역임했다.1589년 정읍현감 재직 중류성룡의 추천으로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가 되고, 절충장군(折衝將軍), 만포진첨사(滿浦鎭僉使),진도군수 등을 거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어임진왜란에 참전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통솔하는 지도력, 뛰어난 지략,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전술로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해 나라를 구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증의정부우의정에추증되고 덕풍군에 추봉되었다가,광해군 때 다시증의정부좌의정에추증되고 덕풍부원군에추봉되었고,정조 때에는증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加贈)되었다.
한성건천동(현재의서울특별시중구 을지로18길 19 신도빌딩)에서이정(李貞)과초계 변씨(草溪 卞氏)의 셋째 아들로 1545년 4월 28일 태어났다.이순신은 어릴때 부터 골목 대장 이었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보냈고, 온양 방씨와 혼인 이후엔 처가인아산에서 지냈다. 이정은 자신의 네 아들에게 고대 중국의 성인으로 알려진복희,요 임금,순 임금,우 임금의 이름자를 붙여 첫째부터이희신(李羲臣),이요신(李堯臣),이순신(李舜臣), 이우신(李禹臣)으로 지었다.[3]
고려 때 정5품 신호위 중랑장(中郎將)을 지낸덕수이씨의 시조 이돈수(李敦守)의 12세손이며,조선 초 예문관 대제학,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등을 역임한 정정공(貞靖公)이변(李邊)[4]의 후손이다. 증조부이거(李琚)는 정언, 이조좌랑, 통덕랑 수(守)사헌부장령, 1494년 연산군이 세자시절 세자시강원보덕 등을 지내고, 연산군 즉위 초에는 통훈대부(정3품 당하관)로 승진, 장악원정, 한학교수를 지냈으며, 연산군 초에 춘추관편수관으로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순천도호부사, 행호군을 거쳐 최종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조부이백록(李百祿)은 흔히들조광조와 가깝게 지내던 중1519년(중종 14)조광조의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입고, 이후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조부이백록(李百祿)은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합격과 동시에 음서로 관직에 오를 수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오랫동안 성균관 생원으로 있었다. 이후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으며 1534년(중종 29)과 1540년(중종 35) 사이에 선교랑 평시서 봉사를 지냈다. 아버지이정(李貞)은음서로 관직에 올라 1573년(선조 6) 병절교위를 거쳐 1576년(선조 9) 종5품 창신교위를 지냈다. 어머니 초계변씨는 생원 변성의 딸이다.
1565년 이순신은방씨(方氏)와 혼인하고보성군수를 지낸 장인방진의 후원으로 병학을 배우면서 무과(武科)를 준비하였다. 28살이던 1572년(선조 5년)훈련원 별과(訓錬院 別科)에 응시했으나 시험을 보던 중,말에서 낙마하여 주변 사람들이 기절한 줄 알았으나 옆에 있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리를 동여매고 시험을 끝까지 치렀다. 하지만 결국 시험에서는 낙방하고 만다.
4년 뒤인1576년(선조 9년) 그의 나이 32살에 식년시(式年試) 무과에 병과(丙科) 제4인[5]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훈련원 봉사 실습생으로, 정식 직책이 아니다.)로 처음 관직에 나섰다. 조선시대 무과 합격자 분석에 의하면 당시 그의 나이는 현대인의 상식과 달리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아니다. 급제 후1576년 12월에 동구비보권관을 거쳐1579년에는 10개월간해미에서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였다.[6][7] 훈련원 봉사 재직 중 자신의 친구를훈련원 참군으로 추천하는 병조정랑 서익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 뒤 36세가 되던 1580년 7월에 전라도 발포의 수군만호(水軍萬戶)로 전근되었다. 발포는 현재의전라남도고흥군도화면발포리이다.
발포수군만호 재직 중전라좌수영의 오동나무를 베기를 거부하여 전라좌수사 성박(成博)의 미움을 받았다. 성박은 군관을 시켜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관사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게 했지만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나라의 재산인 나무를 벨 수 없다 하여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성박은 후임자에게 이순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을 남겼고, 후임 전라좌수사 이용은 이순신을 밉게 보았다. 이용은 좌수영 관하의 다섯 포구인 발포, 여도, 사도, 녹도, 방답진을 점검하였다. 이때 다른 4개의 포구 이탈자는 보고하지 않고, 이순신이 지휘하는 포구의 3명만 보고하였다. 이순신은 다른 4개 포구의 결과를 조사하여 보고하려 하자, 이용은 즉시 장계를 회수하였다. 이용은 그의 근무성적을 최하로 매겼는데,전라도도사(都事)로 재직 중이던조헌(趙憲)은 고과내용을 보자 부당한 처사라며 항의하여 수정하게 했다. 나중에 이순신의 인물됨을 알아본 이용은 생각을 바꾸어, 함경남도 남병사로 전근한 뒤 1583년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으로 추천하기도 했고, 건원보 권관으로 천거하였다.
1582년 1월 발포만호로 재직 중일 때 서익이 군기경차관으로고흥군에 왔다. 이때 서익은 발포진을 찾아가 군기보수 불량이라는 이유로 그를 파직시켰다. 그러나 곧 복직하였다. 1583년 함경남도병사 이용의 추천을 받아 남병사의 군관이 되었다가, 1583년 8월 건원보 권관으로 천거되어 나갔다.
그 후 북방 국경 지대인함경도로 가서여진족 방어를 맡았으며,1586년(선조 19년)에 사복시 주부가 되었고, 이어 조산만호(造山萬戶) 겸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가 되었다.[8] 한편 그를 유심히 지켜본병조판서김귀영은1579년 자신의 서녀를 그에게 첩으로 주려 하여 불렀다. 그러나 어찌 권세가의 집에 드나드느냐며 그 제의를 거절하였다.
1587년(선조 20년) 조산보만호 겸 녹도 둔전사의 이순신에게녹둔도의 둔전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해 가을에는 풍년이 들었다. 그해9월 1일 이순신이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군대를 인솔하여 녹둔도로 가서 추수를 하는 사이에 추도에 살고 있던 여진족이 사전에 화살과 병기류를 숨겨놓고 있다가, 기습 침입하여녹둔도 전투가 벌어졌다.녹둔도 전투에서 조선군 11명이 죽고 160여 명이 잡혀갔으며, 열다섯 필의 말이 약탈당했다. 하지만 이일이 도망치는 와중에 이순신은이경록과 남아서 싸웠고 그 결과 승리했으며 조선인 백성 60여 명을 구출했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의 무예는 대단했는데 고작 수십명의 병사들로 1,000기의 여진족 기병을 상대로 방어에 성공했으며 반격하여 무찔렀다.
당시 조산만호 이순신은 북방 여진족의 약탈 및 침략을 예상하고 수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여러차례 북병사 이일에게 추가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모두 거절 당하였다. 이 패전으로 인해 책임을 지게 된 북병사 이일은 이순신에게 그 책임을 덮어 씌우고 이순신은 죄를 받아 수금되었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전투의 결과를북병사이일(李鎰)은녹둔도 함몰이라고 비판하였다. 처음부터 군사 10명이 피살되고 106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말 15필을 빼앗기는 등의 피해가 많았다 하여 이녹둔도 사건으로 인해서 함경도 북병사이일(李鎰)의 비판으로 문책받고 그해10월 해임, 결국 투옥되었다. 북병사 이일은 이경록과 이순신을 투옥한 뒤,1587년10월 10일 "적호(賊胡)가 녹둔도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군기를 그르쳤다"고 장계를 올려 이를 보고하였다.
이일은 장계를 올려 사건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경록과 이순신을 군율로 극형에 처하여야 한다고 이경록과 이순신을 모함했다. 그러나 이때 이경록 등을 변호한 이는이억기 등 소수였다.10월 16일선조는 한번의 실수로 사형은 과하다며, 북병사에게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하라고 지시했고[9], 조정에서는백의종군하게 하여 입공자속(立功自贖)할 기회를 주라고 권고하였다.
선조는 이일이 이순신을 모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으나 선조가 당대 조선의 맹장인신립의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이일은 정치적으로 신립과 같은 파벌이었으므로 선조는 신립을 분노하게 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경록과 이순신을 처벌은 하되, 참수형이 아닌 백의종군으로 일단락 시켰다. 선조가 이일의 모함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조치였으며 만약 이일의 모함을 선조가 몰랐더라면 이경록과 이순신을, 이일의 건의대로 참수형에 처했을 것이다.
명백히 이순신은 싸워 이긴 것이며 모든 잘못이 이일 혼자에게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이일이신립과 친분이 깊다는 점 때문에 신립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일에게 처벌하지 않고 이순신에게 처벌했다. 조선군 11명 전사와 160명이 포로로 잡힌 것은 이일이 그렇게 한 것이며 이순신과 이경록은 이를 뒷수습하기 위해 고군분투를 했을 뿐이다. 실제로도 이순신은 이일에게 지원 병력을 요청했지만 이일이 이를 거절해서 이렇게 된 것이다. 현재도 녹둔도의 일은용인 이씨 가문에서 계속 왜곡하고 있다.
이후 이순신은 북병사 휘하에서 종군하며1588년의 2차 녹둔도 정벌에서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은 공으로 사면을 받아 복직되었다.
그 후, 전라도감사 이광(李珖)에 의해 군관[10]으로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선전관(宣傳官) 등이 되었다.1589년(선조 22년)1월에비변사(備邊司)가 무신들을 다시 불차채용(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게 되자이산해(李山海)와정언신의 추천을 받았다. 7월에 있어서 선정을 배풀어 백성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1590년8월 조정에서는 그를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1년2월에선조는이천·이억기·양응지·이순신을 남쪽 요해지에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선조는 신하들의 반발과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을 써서1591년2월 이순신을 종6품 정읍현감에서 종4품 진도군수(선조가 다시 비변사에 "이경록과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하라"는 전교를 내렸다.1589년12월에류성룡(柳成龍)이 천거하여 이순신은 정읍현감이 되었다. 관직에 오른 지 14년 만이었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珍島郡守)로 승진시켰고, 그가 부임지에 부임하기도 전에 종3품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다. 이어 선조는 이순신이 가리포에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정3품 전라좌수사에 전임하게 하였다. 또한,선조는 이순신과 같이 백의종군을 하였던이경록도 전라도의 요지인 나주목사에 제수하였다. 계속되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선조는 이순신을 수사로 삼으려는 심지를 굳혔다. 그는이경록의 발탁은 천천히 생각하여 결정하겠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수사 발탁은 개정은 할 수 없다고 하며 밀어붙였다.[11]
1591년 이순신은 47세에 정3품당상관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부제학김성일(金誠一) 등 많은 신하가 그의 경험이 모자라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그와 같은 선조의 결정을 반대하였으나, 선조는 이순신을 신임하였다. 한편 이순신은 부임지에 부임하자마자 전쟁에 대비하고자 휘하에 있는 각 부대의 실태를 파악하였으며, 무기와 군량미를 확충하고거북선을 개발 및 건조하는 등 군비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1592년에 이순신은 일본은 섬이니 일본의 수군이 강할 것이라고 예단해 수군을 육지로 올려 보내 수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에 대하여 이순신은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아니 되옵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의 감독아래에 있던 전라좌수영은 20여 척(최소 26척 최대 29척)의 판옥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1592년(선조)5월 23일(음력 4월 13일)에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던 일본군 함대 700척이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당시 선봉군의 병력은 약 16만명이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의 침략이 알려진 때는원균(元均)의 파발이 도착한 5월 26일(음력 4월 16일) 밤 10시였다. 이순신은 그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렸고 아울러 경상, 전라, 충청도에도 왜의 침략을 알리는 파발을 보냈다. 그 뒤 이순신은 휘하의 병력 700여명을 비상 소집하여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도주를 시도한 군졸 황옥현(黄玉玄)을 참수했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는6월 8일(음력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도록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러나 일본군 함대는 이미 전라좌도 앞바다에 도달하고 있었다. 다음날 9일(음력 4월 30일)에 이순신은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진해오자 조정은 보름 만에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했으며,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퇴각했다. 선조는1593년(선조 26)9월 21일에 한성을 탈환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몇번을 주저하다가1593년10월 1일에 도성으로 돌아왔다.
옥포해전은 이순신의 첫 승전을 알리게 된 해전이다.6월 16일(음력 5월 7일) 정오옥포항에서 정박하여 옥포에 침략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잡혀있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대선 4척, 소선 1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다. 전투는 17일(음력 5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일본군이 보유한 군선 13척을 침몰시켰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육지로 도망간 적들을 쫓지는 못하였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미한양에서 파천하여 평안도로 후퇴하고 있었다. 27일(음력 5월 18일)에는 도원수김명원(金命元)이임진강 방어에 실패하여 일본군이 황해도까지 진격하는 것을 허용하고 말았다.
전라우수영군의 합류가 늦어지자, 7월 8일(음력 5월 29일)에 이순신은 뱃머리를 돌려노량으로 향하였다. 그곳에서원균의 경상우수영군을 만났다. 이날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총 적선 13척을 쳐부수었다. 이것이 바로사천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왼쪽 어깨 위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해전은 두 번째 출동하여 벌어진 첫 번째 전투였고, 또한거북선이 출전한 첫 번째 전투다.
이순신 함대는 7월 10일(음력 6월 2일)에도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는데, 일본군이 보유하던 화포에 비하여 성능이 우수한지자총통 등의 화력이 승리의 원인이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계속하여 적을 추격하여 개도로 협공하였으며, 7월 12일(음력 6월 4일)에는 전라우수사와 합류하는 데 성공하였다. 13일(음력 6월 5일) 적 함대를 만나 큰 배 한 척과 중간 크기의 배 0척 작은 크기의 배 100척을 공격하였다. 16일(음력 6월 8일)까지 수색과 공격은 계속되었다.
한산도대첩은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1592년(선조 25)8월 14일(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학익진을 처음으로 펼쳤다.
이순신의 함대는 이억기의 함대와 함께 8월 12일(음력 7월 6일)에 출발하여 당일 노량에 이르렀고, 이곳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이 때 적선이 출몰하였다는 첩보를 얻어 8월 14일(음력 7월 8일) 큰배 36척, 중간배 24척, 작은배 13척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군 연합함대는 거짓으로 후퇴하는 척하여 적들을 큰 바다로 끌어 낸 다음, 모든 군선들이 일제히 학익진 진형을 갖춰지자총통,현자총통,승자총통을 발포하여 적함선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포격으로 적함을 깨뜨린 뒤 적함의 갑판에서 백병전을 벌여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며, 여러 명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이날 일본군은 큰 배 한 척, 중간 배 일곱 척, 작은 배 여섯 척만이 후방에 있어 도망을 칠 수 있었다.
8월 15일(음력 7월 9일)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아 8월 16일(음력 7월 10일)학익진을 펼친채 진격하여 왜선 59척을 침몰시켰다. 한편, 음력 7월 말에 이르러서야 육전에서도 홍의장군곽재우(郭再祐)가 승리하였으며,홍계남(洪季男)이 안성에서 승리하였다.
음력 8월 말 이순신의 함대는 전열을 정비하고 부산으로 출정하였다. 당포에서 경상우수사와 합류하였으며, 29일 적들의 동태에 대한 보고를 입수하여 그날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음력 9월 1일 아침, 화준구미에서 일본군의 큰 배 5척, 다대포 앞바다에서 큰 배 8척, 서평포 앞바다에서 큰 배 9척, 절영도에서 큰 배 2척을 만나 쳐부수었다. 부산 앞바다에 이르러 적의 소굴에 있는 400여 척의 배 중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었으며, 2일까지 전투를 벌였다. 이때 배들을 모두 부수면 상륙한 일본군이 몰려 도망갈 방법이 없어지므로 후일 수륙에서 함께 공격하기 위해 함대를 물렸다.
이렇듯, 네 차례의 큰 싸움을 통해 일본군은 수로를 통하여 서해에 대한 해상권을 장악하여 보급로로 사용하려던 계획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으며, 곡창인 전라도의 침략 또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진격은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그러나 네번의 전투를 거치는 중, 이순신이 아끼던 휘하장수정운이 전사했다.
1592년 음력6월원균이 이순신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먼저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조정에 싸움의 결과를 보고하였으며, 이 때문에 두 장군 사이에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난중일기에서 원균의 성품과 인격에 문제가 많으며, 일의 처리에서도 불만인 점을 자주 기록하였다.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 된 원균은 이에 반발하고 명령을 어기는 등 문제를 일으켜 두 사람의 틈이 더욱 더 벌어졌다. 이순신은 조정에 원균과의 불화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파직시켜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옮겨 제수하였다.
이후 원균은 이순신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출처 필요]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서 증거를 찾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이순신이 반듯하고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한다.[12]
원균과의 대립은 각기 정파적인 입장과 맞물려서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조차도 이러한 두 인물에 대한 입장차이가 심하다. 이에 대한 논의는 당시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이 끝나고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에서도 진위 및 당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미국과 영국 해군 교과서를 쓴 책인 '해전의 모든 것'(휴먼 앤 북스 펴냄)에서 이순신을 전설적인 명장 제독으로 추앙하는 반면, 원균은 조선 수군을 산채로 매장한 최악의 제독으로 평가한다.
이순신 함대는1593년3월 12일(음력 2월 10일) 웅천현 웅포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정면승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왜성 깊숙히 유인하여 격파하려는 유인책을 썼다. 조선 수군은 이에 유의하며 화포등을 이용한 공격을 하였으나, 싸움은 지루한 공방전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각지에 왜성을 쌓아 방비를 하며 왜성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아 조선 수군의 부산성 방면으로의 진출을 막음으로써 보급선을 유지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웅천에서의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는 음력 3월까지 계속되었다.이때 전라도의 수군은 정병 상하번 외에 보인까지 총동원, 4만여 명(충무공 장계)을 웅포 해전과 전라도 해안선 방어에 투입하였다.
음력 6월 이순신은한산도로 진을 옮겨 전열을 정비하였다. 음력 7월부터는거제도와 진해(鎭海), 가덕도(加德島) 등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조선 3도 수군은 견내량에 방어선을 설정하였다. 한편, 일본군은 거제도의 영등포와 제포 사이를 방어선으로 삼고 있었다. 음력 8월 1일,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고 본직은 그대로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백성을 모아 소금을 굽고 곡식을 비축하여 든든한 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한편김성일 등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은 함락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진주를 지켜 전라도 호남 지방을 방어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이 지역을 통해 조선의 군수 물자와 전쟁 수행 능력이 보장되었다.
초기 전세가 교착화하고 강화 회담이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대치 상태가 자꾸 길어졌다.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불화가 문제가 되었다. 두 차례의 대첩 이후 이순신이 그 공으로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원균은 자기가 나이도 많고 선배라는 점을 내세워 불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13]
교착화한 전세에서 초기의 승전보 이후 별다른 승리가 없자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이순신에게 왜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총집결하여 왜성을 쌓는 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강화 회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명나라는 전면적 대결보다는 강화 회담에 기대하고 있었으며, 조선은 자체의 군사력으로 일본군과 육전에서 대등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과는 달리 이순신은 일본군의 유인작전에 걸려들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 견내량 전선을 유지하고 공격에 신중하게 임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당시권율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이순신은권율의 본진을 찾아가는 길에 가족을 만나려고 아산 본가에 잠시 머물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은 순천 고음(舊 여천시)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먼 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5월 26일(음력 4월 11일) 배 위에서 별세하고 만다. 그러나 이순신은 모친의 임종을 볼 수 없었다. (어머니의 임종소식은 4월 13일에서야 종 순화를 통해 알게 된다.) 이렇게 어머니를 잃은 이순신은 슬픔으로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졌다.
1597년8월 28일(음력 7월 16일)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춘원포로 후퇴, 수군들은 상륙하여 도주하고 판옥선 대부분이 불타거나 왜군에게 노획당해 오사카로 끌려간다.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경림군(慶林君)김명원(金命元), 병조 판서이항복(李恒福)의 건의[14]로 이순신을 다시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모아 정비했을 때 함선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 병력으로 적을 대항키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10월 9일(음력 8월 29일)에진도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1597년 10월 26일(음력 9월 16일),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3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량 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 폭이 294m 밖에 되지못하여 바다 표층의 유속 6.5m/s정도로 굉장히 빠르고,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울돌목의 조류가 싸움에 불리함을 깨닫고 새로 합류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우수영(右水營) 앞바다인 임하도(林下島)로 진을 옮겨 일본 함대를 그곳으로 유인해 최소 130척 이상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난중일기와 선조실록에는 약 30여 척을 격침했다고 기록하였으나 이것은 통제사 이순신이 이끄는 공격부대의 전과일 뿐 임하도의 좁은 목을 막고 있던 수비 부대의 전과나 피해 사항은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난중잡록과선묘중흥지을 통해서 조선 수군은 중.후반부터 화전(火戰)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통제사가 적의 선봉대중 30여척을 격파하였지만해남 명량대첩비에는 500척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실제 격파된 왜선은 30여척보다 많을것으로 파악된다.
"破賊船五百艘 斬其將馬多時" "적군의 배를 쳐부순것이 오백척이며 그 장수 마다시를 베었다"<해남 명량대첩비>
이를명량 해전이라고 하며 이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일본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이듬해 1598년 음력 8월 18일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병사하고, 사망 직전 철군하라는 유언을 남기며 일본군이 철수하게 된다.
1598년 음력 11월 18일에조선 수군 70여 척,명나라 수군 400척이 노량으로 진군했다. 군사는 1만 6천명이었다. 이순신은명나라 부총병진린(陳璘)과 함께15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부터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일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던 왜군 선단 500여 척 가운데 200여 척을 격파, 150여 척을 파손시켰다. 전투는 정오까지 이어졌고,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적하던 이순신은 날아온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죽기 전에 그는 "지금은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향년 54세. 낙안군수방덕룡(方德龍), 가리포첨사이영남(李英男)과 명의 장수등자룡(鄧子龍)도 함께 전사했다.[15]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의 임진왜란은 끝나게 되었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당시 사람들이 모두 죽은 이순신이 산 왜놈들을 격파하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순신의 조부 품앙공(楓巖公)이백록(李百綠)은중종 14년(1519년) 학행이 높고 문장 기절을 지녀 기묘사적에 들어갔다.중종 17년(1522년) 임오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으로 생원이 되었으며 같은해 사마 행검으로 생원 선교랑 참봉에 천제되었으나기묘사화의 영향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성균관 생원을 거쳤으나 문과에 급제는 하지 못하였고 선교랑평시서봉사를 지냈다. 중종 35년(1540) 품행의 문제로 탄핵되고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고기리에서 여생을 보내다 중종 39년(1544) 중종의 국상에 결례를 범한 오해(삼남 이귀(李貴)의 혼사시 주육설판)로 의금부에서 곤장으로 복초(服招) 당한 후 녹안되었으며 회복하지 못하고 별세한 것으로 추정된다.
흔히들 이순신의 조부 품앙공(楓巖公)이백록(李百綠)이중종 14년(1519년)조광조(趙光祖)가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약을 받아 죽고 주위 인물들도 참형을 당한 뒤 벼슬을 내놓고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용인 심곡리에서 멀지 않은 고기리에서 은거를 하다가 사망했으며, 이로 인해 아들(즉 이순신의 아버지) 정(貞)은 벼슬을 단념한 채 43세쯤 외가이자 처가에 가까운 충청도아산 음봉(훗날 상주 방씨(온양 방씨)와 혼인한 이순신이 정착한 곳이기도 한현충사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하였다고덕수 이씨 집안의 구전으로 전해진다 알려져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KBS드라마불멸의 이순신에서 역적 및 가난한 시절을 보내는 줄거리는 허구다. 어머니인 초계 변씨(草溪卞氏)가 1588년 3월 12일 작성한 별급문기를 참고하면 전국에 노비 총 21명(노 12명, 비 9명)과 토지(영광, 나주, 고흥, 영변, 은율 등)를 소유하고 있었다. 슬하에 형제들에게 생전 재산증여가 이루어 졌는데 장남 이희신(李羲臣)과 이우신(李禹臣)에게 명종 19년(1564), 차남 이요신(李堯臣)이 생원이 되었던 선조 6년(1573), 삼남 이순신(李舜臣)이 무과에 급제하였던 선조 9년(1576)이다. 또한 선조 22년에 아내 상주 방씨(온양 방씨)가 4형제에게 준분재기 기록도 남아있다. 현충사 경내에 있는 고택 역시 이순신이 자신의 할아버지 백록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알려졌다.[18][19][20]
이순신의 두 형인이희신과이요신은임진왜란 발발 전 모두 별세하였다. 기록 상임진왜란에 함께하여 공을 세운 조카들은이분,이완,이봉,이해이다. 특히 이완은노량해전에서 숙부인 이순신이 《전방급 신물언아사》를 남기고 죽자 이를 알리지 않고 독전한 인물로 유명하며 이요신의 두 아들인이봉과이해는 전쟁이 끝난 후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1605)되고 무반 생활을 지속한 것으로 보아임진왜란과정유재란에서 공이 적지 않은 것으로 사료된다.
이순신은 한성을 떠나 외가와 처가(온양 방씨)가 있는 충청도아산으로 이주했다. 조선 중기까지도 남귀녀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으로 남자가 결혼한 뒤 처가에서 상당 기간 거주하는 풍습은 부인과 처가의 위상을 높였다.
이순신의 처가는 상주 방씨(온양 방씨)이다. 장인은 보성군수를 역임한 방진이다. 방진의 할아버지는 평창군수를 지낸 방홍(方弘)이고, 아버지는 영동현감을 지낸 방중규(方中規)이다. 당시 병조판서였던 이준경(1499년~1572년)이 중매를 섰다.[21] 1565년(명종 20) 이순신은 21세의 나이에방씨에게 청혼하고 결혼하였다. 이순신은 장인의 격려와 경제적 후원으로 무과 시험을 준비하게 되며, 그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배우면서 병학을 익혀 11년만인 1576년 2월에 치러진 무과 시험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충무공이순신전서》의 ‘방부인전’에 방진의 활솜씨에 대한 기록이 있다.방씨 부인은 슬기롭기로 유명하였고, 친정 집에 들어온 도둑들을 지혜를 이용해 물리치기도 했다. 이순신의 무술 연습을 위해 자신의 패물로 말을 사게 할 만큼 내조도 잘했다. 임진왜란 중에 이순신은 아들들을 통해 충청도 아산 본가에 있던방씨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직접 다녀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방씨가 병에 걸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잠을 설치며 걱정했을 뿐더러 점까지 치며 방씨 부인을 염려하는 내용이 일기에 적혀 있다.[22] 1598년 (선조 31)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에게 우의정이 증직된 후 그 처인방씨를 정경부인으로 봉하면서 내린이순신처 방씨 고신교지(李舜臣妻方氏告身教旨)는 보물 제1564-8호이다. 정경부인은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정·종 1품 문무관의 처에게 내리는 명호(名號)로 외명부 부인으로서는 최상급의 품계이다.
이순신은방씨와의 사이에서이회(1567년 출생),이예(1571년 출생),이면(1577년 출생)의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으며 해주오씨와의 사이에이훈(1574년 출생),이신(출생년도 미상)의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이순신은임진왜란과정유재란에 가문의 절손 위험이 있음에도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하기 위하여 아들과 조카들을 의병 신분으로 참전시켜 각종 전투에 함께 하였다. 특히 이순신이 전사한노량해전의 경우 《조선왕조실록》, 《징비록》의 기록을 참고하면명량해전 직후 전사한이면(李葂)을 제외하고 대장선에 장자인이회(李薈), 차남이예(李䓲), 조카이완(李莞)이 승선하여 전투에 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이순신의 후손은 서자인이훈(李薰)의 손을 제외하고 모두 장자인이회(李薈)의 직계 후손이다.
이순신과 한 동네에서 살았던 벗이기도 한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어린 시절의 이순신에 대해,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곤 했으며, 그의 성격을 거슬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눈을 쏘려고 하였으므로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이순신은 완벽주의자로 뭐든지 철저함을 추구했다.한산도 대첩 하루 전 군무이탈을 감행한 부하 수졸 황옥현을 붙잡자마자 바로 참수하여 효수해 군기를 보존한 반면 부하들에게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면 무조건 이긴다, 하지만 도망치려 하면 죽는다(必死則生必生則死)는 것을 강조하여 부하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부하들이 잘하면 포상에 아낌이 없었다. 군영 순시 중에 자신이 담당하던 업무에 소홀하였던 일선 지휘관은곤장을 쳤다는 기록이 몇번 있다.[24] 또한 자신의 군공보다는 아군의 승리에 더 관심이 깊었으며 이 때문에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권율에게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의 일부를 제공했으며 권율은 이순신에게 제공받은 이 무기들로행주대첩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순신의 용모에 대해서는 이순신 생전에 그려진 초상화가 없고 그의 얼굴을 묘사한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100원 주화에 새겨진 이순신 제독의 복식이나 이순신 제독의 초상화 중 갑옷이나 전립이 아닌 관복 차림의 이순신 초상화는 영의정의 예우를 갖춰 그려졌고 실제로 이순신이 살아생전 그 복장을 입은 적은 없다.
녹둔도 사건으로 알 수 있듯 이순신은 무예가 매우 뛰어났다. 고작 수십명의 보병으로 1천 기에 달하는 여진족 기병을 상대로이경록과 단 둘이 지휘해서 이겼는데 휘하 병력이 100명 이하인 상황이라면 개인 무예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승리를 거둔 이순신은 무예가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효종이 경연 자리에서, "아침에 이순신(李舜臣)의 비문(碑文)을 보았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殉節)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우리 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순신의 재능은 악비(岳飛)와 같은데, 더욱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공격하는 데 능하였다."고 하였다.[27]
효종 임금에게, "조정에서 현재 절의를 숭상하고 장려하는 은전을 시행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나라에서 충신으로 드러나 칭송할 만한 이는 고 통제사 이순신(李舜臣)만한 이가 없는데도, 묘소에 아직까지 조그만 표석(表石)조차도 없으니, 이는 자손들이 미약한 소치입니다."고 아뢰었다.[30]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관음포의 이충무공전몰유허(李忠武公戰歿遺墟)에서 홍석주는 이순신을 중국의 제갈량에 빗대어 칭송하고, 제갈량이 병사한 뒤에는 촉한이 위태롭게 된 것과는 달리 이순신은 오히려 그가 남긴 공적 덕분에 지금(홍석주가 살아 있었던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직(社稷)이 남아 있을 수 있다며 이순신의 공적을 치켜세우고 있다.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충무공은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성자라 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천관우) 등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아주 높았다.
그의 이름은 서구 역사가들에게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공적으로 보아서 위대한 해상지휘관들 중에서도 능히 맨 앞줄을 차지할 만한 이순신 제독을 낳게 한 것은 신의 섭리였다. 이순신 제독은 광범위하고 정확한 전략판단과 해군전술가로서의 특출한 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탁월한 지휘통솔력과 전쟁의 기본정신인 그칠 줄 모르는 공격정신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가 지휘한 모든 전투에 있어 그는 언제나 승리를 끝까지 추구하였으며, 그 반면에 그 용감한 공격이 결코 맹목적인 모험은 아니었다는 점은,넬슨(Horatio Nelson) 제독이 기회가 있는 대로 적을 공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다가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순신 제독이 넬슨 제독보다 나은 점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계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
—영국의 해전사 전문가이자해군중장 G. A. 발라드(George Alexander Ballard),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
2010년 10월에 발매된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인 《문명 Ⅴ》에서는 처음에는 등장하지 않았던대한민국이2011년 8월에 DLC로써 추가되었는데, 여기서 대한민국의 고유 유닛으로 이순신의 지시로 건조된거북선이 르네상스 시대 초기에 등장한다.
앞서 거론된 《문명 Ⅴ》의 확장판의 개념으로2012년6월에 발매된 《문명 Ⅴ신들과 왕들》에서는 기존에 등장하던 '위대한 장군'과는 별도로 해군 유닛에게 특수한 효과를 부여하는 '위대한 제독'으로 세계적인 해군 제독들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 한 명으로 이순신이 등장한다.
남코에서 개발한 대전검술격투게임소울칼리버에서 이순신은 등장인물인 성미나의 아버지의 친구로 설정되어 있다.
↑이순신이 받은 충무(忠武) 시호 글자의 뜻은, 자기 몸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든 것[危身奉上, 위신봉상]을 '충(忠)', 적의 창 끝을 꺾어 외침을 막은 것[折衝禦侮, 절충어모]을 '무(武)'이다. 고려, 조선을 합쳐 '충무' 시호를 받은 인물은 이순신을 포함해 10명이며, 글자의 뜻이 서로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