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는 산으로 둘러싸인 여러 개의 좁은분지들로 이루어진 지형이어서 일핵(一核) 구조가 아니라 도심이 여러 곳에 분산된 다핵도시(多核都市)이며, 용인시는 처인구, 기흥구, 수지구에 걸쳐 영동고속도로, 용인서울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 세종포천고속도로 등이 관통한다.
용인시에서 '용(龍)'자가 들어가게 된 유래에는 이런 설화가 내려온다. 용인시의 좌측으로는 투구봉이 있고 우측으로는 칼봉이 자리 잡고 있는데, 봉우리의 형상이 투구와 칼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투구봉과 칼봉 사이에는 넓은 터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장군대지형의 땅'으로 믿고 있다. 장군이 무술을 연마하기에 꼭 알맞을 정도의 넓은 지형이다. 옛날에 남씨 문중에서 이곳에 묘를 썼는데, 그 후 얼마 안 있어 그 문중 가운데 한 집에서 아기장수를 낳았다. 아기는 낳은 지 사흘 만에 옆구리에 날개가 돋아났으며, 힘 또한 장사여서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
아기장수(우투리)가 태어날 무렵은 당파싸움이 치열하던 때로, 자신의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 서로 간에 암투가 끊이지 않아, 혹 다른 집안 자제 가운데 장차 훌륭하게 될 소지가 있는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는 물론 그 집안 전체를 몰살하였다. 열세에 몰려 있던 남씨 문중에선 아기장수가 태어난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될 것이라고 불안해했다. 남씨 문중에서는 전체 회의를 열어 숙고한 끝에 아기장수가 성장하기 전에 처단할 것을 결의하였다. 워낙 힘이 센지라 여럿이 커다란 바위로 눌러 죽였다. 아기를 양지 쪽에 묻어 주려고 땅을 파보았더니 거기에서 투구와 칼이 나왔다고 한다.
한편, 남씨 가문에서 아기장수가 태어날 때 장군대지형에서 마주 보이는 액교산에 있는 바위에서 용마(龍馬)가 나와 울었다고 한다. 이 용마는 아기장수가 죽자 태울 주인이 없음을 슬퍼하며성산(城山,석성산)을 향해 달려나갔다. 현재 고림리의 액교산에는 용마가 났다는 용마바위가 아직도 전하는데, 용마가 몸부림치며 울부짖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곳 지역은 이런 설화가 많다. 「고장군 묘소 전설」, 「아기장수와 용마바위」, 「유방리의 남씨네 아기장수」등이 내용이 비슷하다. 이것이 훗날에조선시대의남이장군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이런 전설들이 전해져삼국시대의 구성현(駒城縣)이 고려 초 용구현(龍駒縣)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좌전고개 만세운동은 일제 강점기 때 일어난 운동으로 용인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며, 이를 기념하는 기념탑이 현재 사적지의 기념물로용인 독립만세운동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좌전고개 만세운동」이라고 불리는용인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오전 3시 주민 1천여 명이 참가해 벌인 용인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으로, 이날을 계기로 1만3천여 명이 동참했고 이 중 700여 명이 일제에 의해 죽거나 실종됐다.
경기도 남부 내륙에 있으며, 지질은 주로화강암과 화강편마암으로 되어 있다. 역내는 광주산맥의 여맥이 기복하여 구릉이 각처에 발달하고 소분지가 점재하며, 하천은 중앙지대를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흐른다.
하천으로는탄천이 북류(北流)하여한강에 합하고, 구흥천이 남으로 흘러평택시를 지나 분향만으로 유입되며, 동남쪽으로 청미천의 상류가 흘러 유역의 소분지를 관개한다. 용인 일대는 광주산맥의 낮은 구릉이 경안(京安)과 김량장의 침식곡으로 동서로 분단된 서쪽 지방이다. 용인시의 땅 모양이거북과 같다 하여, 이른바풍수지리에서 이야기하는 길지로 알려진 곳이 많다. 그리하여 용인시기흥구공세동 자봉산 기슭에는숭례문과풍남문을 축성한 평도공(平度公) 최유경(崔有慶)의 효행심으로부터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이라는 표현이 유래하였다.[33]
용인시의 인구는 2017년 6월 30일 주민등록(내국인) 기준으로 99만 6894명이며, 이 가운데 남자는 495,643명, 여자는 501,251명으로 여자가 다소 많아 성비는 98.8이다. 외국인은 15,761명이다. 유소년 인구비율은 18.3%, 노인 인구비율은 10.3%이다.
용인시 전체 면적의 20.9%를 차지하는기흥구,수지구에 시 전체 인구의 77%가 거주해 인구가 시의 서북부에 집중되어 있다.처인구에는 229,588명(23%)이, 기흥구에는 418,336명(42%), 수지구에는 348,970명(35%)이 거주한다.
2012년2월 23일 용인시는미국의 산업용 가스 제조업체인 프렉스에어코리아㈜가 1180억원을 들여 기흥구에 공장을 신설하기로 했다고 밝혔다.공장은 기흥구 농서동 24,029m2부지에 연면적 4,243m2 규모로 건설되며, 제조 및 부대시설을 갖춘 초고순도질소가스 제조 공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2018년 기준 용인시의재정자립도는 62.07%로 경기도에서 화성시와 성남시에 이어 3번째로 높다.[37]
용인시의 지역내 총생산(GRDP)는 32조 6,000억원으로 고양, 성남, 수원시와 더불어 경기도 지역 내 총생산의 51.3%를 차지하고 있다. 농림어업(1차 산업)은 4,188억원으로 1%의 비중을 차지하며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59조 855억원으로 72.7%의 비중을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산업)은 21조 7,628억원으로 26.8%의 비중을 차지한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대규모 택지개발의 영향으로 사업서비스(4.1%)와 건설업(3.0%), 도소매업(2.7%)과 부동산업 및 임대업(2.7%)이 주를 이루고 있다.[38]
용인시의 2010년 기준 상주인구는 842,069명이고 주간인구는 769,490명으로 주간인구지수가 91로 낮다. 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76,883명, 유출인구는 147,073명이고, 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18,526명, 유출인구는 20,915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출인구가 72,579명 더 많은데, 이는 수도권에서 서울특별시와 가깝거나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39]
2020년 용인시 산업의 총종사자 수는 52,723개 사업장과 337,516명으로 경기도 총종사자 수의 6.52%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148명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59,208명으로 20.6%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228,330명으로 79.4%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27.1%)보다 낮고 3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 비중(72.9%)보다 높다. 3차산업 부문에서는 도소매업(13.0%), 사업서비스업(12.7%)과 교육서비스업(11.1%), 숙박 및 음식점업(9.3%)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40]
경기도 기념물 제44호로써 용인시 남사읍 아곡리 43번지에 위치해 있다. 총면적 5,820평의 장방형으로 된 토성으로 본래 고려 때 군창(軍倉)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백제 때 축성되었다는 주장도 있다.고려의김윤후 장군이 퇴세를 만회하고몽골의 세력을 몰아내게 한 장소이다.
대한불교열반종의 총본산으로 1970년 실향민인 김해근(법명 해곡 삼장법사)이 세운 호국 사찰로 용인시 해곡동 산43번지에 위치해 있다. 와우정사 내 건물 중 열반전에는 인도네시아에서 들여온 통향나무를 다듬어 만든 길이 12m, 높이 3m의 열반상(와불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는 인도네시아 향나무로 조성한 세계 최대의 목불상으로 기네스북에 기록이 올라 있다.[44]
높이 106m 4층짜리 전망대로죽전역 인근에 있다. 지하에 하수처리장을 짓고, 하수처리장의 굴뚝을 전망대로 활용한 구조물이다. 그래서 건물 내부는 대부분 비어있다. 1층은 로비, 2~3층은 청년 LAB, 4층은 전망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망대에서는 수지구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 전망대는 오후 2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