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슐리 콜은, 아직 10대일 무렵, 클럽 경력을 지역의아스널 FC에서 시작하였다. 아스널 유소년 팀에 있던 그는2000년2월 25일 프로 선수로 계약하였다.1999년11월 30일미들즈브러 FC와의 경기 때스트라이커 포지션으로서 첫 출전을 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18세였다.프리미어 리그 데뷔는2000년5월 14일뉴캐슬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였다. 아스널의 선수진에 완전히 끼기 전 그는크리스털 팰리스 FC에 임대되어 선수생활을 하기도 했다. 거기서 그는, 14여 회의 리그 매치에 출장하였으며, 한 골을 기록했는데, 그 골은블랙번 로버스와의 경기에서의 먼 거리에서의 발리-슛이었다. 2000년 가을, 아스널의 왼쪽 풀백으로서 맹활약을 했던브라질 출신의 선수실비노가 부상을 당하자, 애슐리 콜은 그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아스널로 돌아왔다. 실비노가 부상을 회복한 뒤에도 애슐리 콜이 주전으로 뛰었다.
아스널 FC에 있을 동안, 애슐리 콜은프리미어 리그의 우승을 두 번 차지하게 되었으며, (2002년과 2004년)FA 컵을 세 번 차지하게 됐다. (2002년, 2003년, 2005년)2005-06년 시즌에는 시즌의 대부분을 부상당한 채로 보내야 했지만, 시즌 막바지 아스널이UEFA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했을 때는 부상엣회복되었다. 아스널은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FC 바르셀로나에게 져 준우승했다. 애슐리 콜은 아스널에서 228차례 경기를 뛰면서, 9골을 기록했다.
2005년, 애슐리 콜은 아스널의 리그 라이벌 팀이었던첼시 FC와 부적절한 이적 계약을 맺었다. 이 사실을 그는 아스널에 통지하지도 않았다. 2005년 1월 그가 호텔에서 첼시의 감독 주제 무리뉴, 구단주 피터 케년, 에이전트 조나단 바넷 등을 만난 사실이 인정되어, 애슐리 콜은 유죄 선고를 받았으며, 프리미어 리그에 의해 10만파운드(£)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2005년 8월 열린 항소심에서 1심의 판결이 뒤짚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벌금은 7만 5천파운드(£)으로 줄어들었다. 첼시 구단도 또한 30만 파운드의 벌금, 주제 뮤리뉴도 20만 파운드의 벌금을 부과받았으나, 2005년 8월 항고심에서 7만 5천파운드(£)로 줄어들었다. 바넷의 에이전트 면허는 18개월간 중지당했으며, 그도 또한 10만 파운드의 벌금을 부과받았다.[1]
애슐리 콜은 2005년 7월 18일 1년 연장 계약을 맸었다. 하지만 1년 뒤, 실랄한 비판을 받는 가운데, 그는 아스널을 떠났다. 2006년 7월 15일, 그는 그의자서전에 아스널에 욕설을 실었다.더 선 지가는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애슐리 콜은 아스널의 지도부가 그를 "희생양"처럼 다루었다고 언급하였고, 그들이 불법 계약 사건 이후 그를 "상어에게 먹이를 주듯이" 다루었다고 적었다.[2] 애슐리 콜은,2006-07 시즌 아스널 팀 단체 촬영 사진에서도 타의에 의해 빠졌다.[3] 이 때문에 그가 첼시로 이적할 것이라는 언론의 예측 보도가 심해졌다.
7월 28일, 아스널의 부회장데이비드 다인은 첼시 측과 애슐리 콜에 대한 회담을 가졌다.[4] 첼시는 1천 6백만 파운드에 그를 사겠다고 고집했으나, 아스널은 2천 5백만 파운드를 제시했다.[5] 8월까지 협상은 계속되었다. 끝내8월 31일, 아스널이 이적료 5백만 파운드를 받고,윌리암 갈라스도 데려오는 조건으로 협상이 타결되었다. 이 거래는 이적 윈도(transfer window) 기간이 공식적으로 끝난 뒤에 성사되었는데, 마감 시간이 1시간 반이나 지나서도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었다.[6]
많은 아스널 팬들은 애슐리 콜이 단지 더 높은 연봉을 위해 아스널을 떠났다고 비판하였다. 애슐리 콜은 이 이적 사건으로 인해, 별명 "캐슐리 콜"(Cashley cole)을 얻었다.
애슐리 콜은 첼시로 옮기고서는 등번호 3번을 받았다. 첫 클럽 데뷔전은9월 9일 2-1로 이기는 상황에서웨인 브리지를 교체해서 나간찰턴 애슬레틱 FC와의 경기였다. 애슐리 콜은 아스널에서 보냈던 지난 날 그가 거기서 어떤 것을 느꼈든지 상관 없이 이제는 아스널을 용서한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하였다. 하지만 그는 아스널 FC의 팬들로부터는 용서를 받지 못했는데, 아스널 팬들은 그를 캐슐리(Cash +ashley)라고 비하하기도 했다.12월 10일, 첼시 FC와 아스널 FC가스탬퍼드 브리지에서 만났을 때, 20파운드짜리 가짜 지폐들을 뿌리며 그를 비난했다.[7] 하지만 경기에서 콜은 이러한 비난에 영향을 받지 않고 묵묵히 경기에 임했다.
2007년1월 31일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열린 프리미어 리그 경기이자, 3-0으로 이긴,블랙번 로버스와의 경기에서 심각한 무릎 부상을 당했다. 정밀 검사 결과 생각했던 것보다 심하지는 않았으며, 2006-07 시즌이 끝나기 전에 복귀할 것으로 첼시 관계자는 예상했다.[8] 애슐리 콜은 그 말대로 시즌이 끝날 때 가까스로 돌아왔는데, 그는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2007년 FA컵 결승 경기에 출장했다. 조세 무리뉴 감독이 그를 결승전 선수 명단에서 뺄 것이라고 처음에는 예상됐지만 말이다.[9]
선더랜드와의 2008–09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첼시는 콜의 골로 3-2로 승리하였다.[10] 다음 시즌 콜은 초반 6경기에 연속 출장했으며,번리, 토트넘 홋스퍼, 선더랜드와의 경기에서 각각 그의 3, 4, 5번째 득점에 성공하였다.[11] 2009년 9월 2일, 첼시와의 4년 재계약에 성공했다.[12]
2010년 2월 10일, 콜은 왼쪽 무릎 부상을 당했고, 3개월 동안 출장할 수 없었다.[13] 그는 첼시가 7–0으로 승리했던 스토크 시티와의 경기에 마침내 출전할 수 있었다.[14] 콜은위건과의 2009–10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골을 넣으며 첼시의 8-0 대승에 쐐기를 박았다.[15] 그는 2010 FA 컵 결승전에 출장하였고, 팀은 우승하였다.[16]
2010-11 시즌에도 38경기에 출장했으며, 첼시 선수진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2011-12 시즌 콜은 그의 7번째 FA 컵을 획득하였다.[16]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에서는 메시의 슛을 골라인 앞에서 막아내는 활약을 펼쳤다.[17] 결승전에서는 안정적인 수비와 승부차기에서의 성공으로 팀의 우승을 도왔다.[18]
2012년 12월 1일, 콜은 본인의 리그 350번째 경기에 출장하였다.[19] 2013년 1월 22일, 그는 첼시와의 1년 재계약 연장에 합의하였다.[20] 그 해 첼시는 유로파 리그에서 우승하였다.[21]
2013-14 시즌, 콜은세자르 아스필리쿠에타에게 주전에서 밀려났고,[22] 결국 시즌의 마지막 경기가 있던 2014년 5월 23일, 구단의 방출 선수 목록에 오르게 되었다.
그 이후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도 전 경기에 출전했고, 특히알제리와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 0대 0 무승부를 이끌어내면서 맨 오브 더 매치 (Man of the match)에 선정되었다. 그러나독일과의 16강전에서는프랭크 램파드의 오심 논란과 동시에 상대 선수에게 집중적으로 공략당했고, 대표팀은 4대 1로 참패하고 말았다.
그리고유로 2012에도 출전해 조국의 8강 진출을 이끌었지만,이탈리아와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 조국의 네번째 키커로 나섰지만 실축을 하면서 체면을 구겼다. 이로써 대표팀은 스코어 4대 2로 패하면서 4강 진출에 실패한 것과 동시에 또 다시 승부차기 징크스를 이어가게 됐다. 2013년 2월 6일 브라질과의 친선경기에 출전하여 잉글랜드 선수로는 7번째로 센추리클럽에 가입하였다.
애슐리 콜은 2006년, 자서전 "마이 디펜스"(My Defence)를 출간하였다. 하지만 출간 후 6개월이 지나도록 4000부 이상 팔리지 않았다.[25] 애슐리 콜의 자서전은 그의 전 팀 동료였던옌스 레만 등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26] 동시에 아스널 팬들도월드 와이드 웹에 애슐리 콜의 자서전 대신 아스널 선수페리 그로브의 책을 사도록 권장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하였다.[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