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환지 | |
|---|---|
심환지 영정(보물 1480호) | |
| 조선의의정부영의정 | |
| 재임 | 1800년7월 4일 ~1802년10월 18일 |
| 임금 | 정조 이산 순조 이공 |
| 이름 | |
| 자 | 휘원(輝元) |
| 호 | 만포(晩圃) |
| 시호 | 문충(文忠) |
| 신상정보 | |
| 출생일 | 1730년 |
| 출생지 | 조선한성부 |
| 사망일 | 1802년10월 18일 (73세) |
| 사망지 | 조선경기도포천군포천면 별장에서 노환으로 병사 |
| 국적 | 조선 |
| 학력 | 1771년 정시문과 병과 급제 |
| 당파 | 노론 벽파 |
| 본관 | 청송 |
| 부모 | 심진(부),거창 신씨 부인(모) |
| 형제자매 | 심형지(아우) |
| 배우자 | 안동 김씨 부인 |
| 자녀 | 심능종(양자) |
| 친인척 | 심약(숙부) 김원선(사위) 심태현(조부) 심연(재종질) |
심환지(沈煥之,1730년 -1802년10월 18일)는 조선 의정부 영의정 직책을 지낸조선영조·정조·순조 시대의 문신이다. 본관은청송(靑松)이고 자는 휘원(輝元), 호는 만포(晩圃)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노론벽파의 지도자로우의정·좌의정과영의정 등을 지냈다.심온과심강의 후손으로,심의겸의 형인 심인겸의 8대손으로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심진(沈鎭)의 아들이며,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좌찬성에 추증된 심태현(沈泰賢)의 손자이다.
할아버지는 교리를 지내고좌찬성에 추증된 심태현(沈泰賢)이고 아버지는의정부영의정에추증된 심진(沈鎭)이며, 어머니는대사간을 지낸 신무일(愼無逸)의 딸증 정경부인 거창신씨이다. 부인은 부사 김이복(金履福)의 딸 정경부인 (신)안동김씨이다.
1762년 소과진사시험에 합격하고1771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지내고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1777년 정조 즉위 후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전임되었다. 관료 생활 초기 성리학적 대의명분에 입각한 의리(義理)와 공의(公議)를 중시하여, 언관으로 지내며 의리와 공의를 강조하는 격렬한 언론을 펼쳐 여러 차례의 유배와 귀양살이를 겪기도 하였다.[1] 초년의 심환지는김귀주와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으므로,홍국영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후 홍국영이 김종수 등 노론 강경파와 소론서명선 등 양측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몰락하자, 요직에 올라김종수,유언호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779년홍문관부수찬으로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을 겸하였다. 곧 접위관(接慰官)으로 옮겼다가 다시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로 옮기다.
1784년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겸하였고, 곧 승진하여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이 되었다. 87년 충청도암행어사로 나가 민생을 시찰하고 돌아왔고, 그해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이후당상관으로 승진,1789년사간원대사간,1790년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1791년이조참의(吏曹參議)로 전임되었다.1792년가선대부형조참판으로 승진하였으나 그해평택안핵어사(平澤按覈御史)로 있던김희채(金熙采)의 탄핵(彈劾)으로 김갑도(金甲島)에 위리안치되었다.
1793년 풀려나 복직되었고, 그해이조참판,승정원도승지,규장각제학을 역임했다. 그해 다시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며,대사성으로비변사제조를 겸했다.[1]
1794년 외직인 능주목사(綾州牧使)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제수되었다. 이어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으로 옮겼다.
1795년병조판서로 승진되었다. 이후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에 임명되었고,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였다. 그해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예조판서(禮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이 기간 중 그는 벽파의 선봉장을 자처하여남인계열의채제공(蔡濟恭)·이가환(李家煥),소론 계열의서명선(徐命善) 등에 대한 비판과 공격, 탄핵에 앞장섰다.[1]1795년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으로 승진,1796년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1797년 행대호군(大護軍)으로 전임되었다.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1798년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이 되었다.1799년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겸하였고,경모궁도제조(景慕宮都提調)를 겸하였으며,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으로 자리를 옮겼다.
1800년세자의 사부가 되어세자시강원부(世子侍講院傅)를 겸하였다.
1800년정조가 갑자기 사망하자정순왕후의 신임을 바탕으로순조 즉위 초반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올라원상(院相)으로서의 정무를 보며 내분을 수습하였다. 이어정순왕후(貞純王后)의 수렴청정으로남인과소론 및시파가 몰락하고벽파(僻派)가 집권하게 되었다.
천주교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명,1802년천주교 탄압을 이용하여남인계열과시파를 정치적으로 제거한신유사옥을 주관하였다.[1][2] 이후 정조가 설정한 왕권 중심 군사적 구도의 핵심이며, 시파세력인 김조순(金祖淳) 계열이 진출, 장악하고 있던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하였다.[1] 또한김관주(金觀柱),정일환(鄭日煥) 등 노론 강경파를 등용하여남인,소론 및노론시파 등 반대파에 대한 공격과 탄압에 앞장서게 했으며,권유(權裕)를대사헌에 임명하는 등 같은노론이면서도시파에 속했던김조순 등에 대한 공격을 유도, 지휘하였다.[1]신유박해 때시파(時派)에 대대적 타격을 가하고남인을 공격할 목적으로천주교신봉자 교도에 대한 박해와 처벌에 가담했다.
심환지는1802년10월 18일에 7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 해순조는 심환지에게 문충(文忠)이라는시호를 내렸고,대왕대비(大王大妃)가 승지(承旨)를 보내어 예로써 치제(致祭)하였다. 그러나정순왕후 사후노론시파였던김조순이 집권하면서정조의 치적을 파괴한 역적으로 단죄되었다.1806년 무고한 인명을 살해하고순원왕후(純元王后)의 대혼(大婚)을 방해했다는 죄목으로[1] 관직(官職)을 추탈 당하였다.
노론벽파(僻派)의 거두로 정조와 정치적으로 대립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2009년 2월에 발견된 어찰집(御札帖, 심환지와 정조가 나누었던 비밀 편지 모음)를 통해 밝혀진 사실[4]에 의하면, 정조는 각종 현안이 있을 때마다 비밀 편지로 심환지와 미리 상의했으며, 때로는 서로 '각본'을 짜고 정책을 추진할 정도로 측근으로 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조는 그를 싫어하면서도, 다른 정승, 재상, 중신들에 대한 뒷담을 편지로 보냈고, 심지어는 욕설, 육두문자를 순화해서 편지로 보냈는데 그는 이에 대해 꼬박꼬박 응답했다. 그러나 당시 시국은 그를김종수보다도 극단적인 인물로 비난, 매도했다.
사후 성격이 교활하다는 악평을 들었으나 생전에는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진솔하고 원칙적이었으며 청렴하였다는 평이 있다.정조와 정치적 노선을 달리하였으나 타협을 거부하였고,정조 사후 그가 추진한 정책을 전부 되돌려버림으로써, 자신의 사후 4년 뒤정조의 치적을 파괴한 역적으로 단죄되기도 하였다.
노론 중벽파의 일원인 심환지는남인 다산정약용을 미워하면서도, 정약용의 형제들 중 유독 정약용을 특별대우했다. 정약용을 추국하면서 이런 혼우라도 믿을수 있어야지라고 중얼댄 것을 정약용이 여유당전서에 실어놓았다. 심환지왈, 출출(어허, 이런), 혼우라도 믿을수가 있어야지(沈煥之曰, "咄咄, 婚友不可恃")라 했다.정약용의 둘째 아들정학유는1800년 초, 예조판서심각의 손자 심오(沈澳)의 딸과 결혼했는데, 심오의 9대조 할아버지심달원(沈達源)이 심환지의 10대조 할아버지심연원(沈連源)의 친동생이었다.심연원의 손자심의겸과 그 후손들은서인이 되었지만, 퇴계이황의 문하생 고봉기대승의 문하에서 수학한심달원의 후손들은 그대로동인,남인 당원이 되었다.
자세한 가족관계는심이지 참조
| 전임 서명선 | 조선의섭정 1800년7월 4일 ~1801년10월 27일 | 후임 김조순 |
| 전임 서명선 | 조선의 상급 국상 1789년9월 30일 ~1801년10월 27일 | 후임 김조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