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평부대부인 | |
|---|---|
| 부대부인 | |
| 이름 | |
| 별호 | 상원군부인, 승평부부인 |
| 신상정보 | |
| 출생일 | 단종 3년(1455) |
| 사망일 | 연산군 12년(1506) 7월 20일 |
| 사망지 | 월산대군 사저 |
| 왕조 | 조선 |
| 배우자 | 월산대군 |
| 자녀 | 없음 |
| 종교 | 불교 |
| 능묘 | 월산대군묘 |
승평부대부인 박씨(昇平府大夫人 朴氏,1455년 -1506년7월 20일)는조선 전기의 왕족이다.덕종의 장남월산대군의 부인이자,성종의 형수로,연산군의 백모이기도 하다. 적개좌리공신인박중선의 딸로,중종반정을 주도한박원종의 누나이면서 또한중종의 계비인장경왕후의 이모,인종의 종조모(부계)이자 대이모(모계)가 된다. 본관은순천이다.
첫 봉작은 상원군부인(祥原郡夫人)이었는데 뒤에 승평부부인으로 개봉되었다.
박씨는1466년8월 19일월산대군(月山大君) 이장(李暲)과 혼인했다.[1] 당시 박씨의 아버지 박중선은 병조 참판으로,세조의 이종사촌이었다.[2] 박씨와 월산군의 혼인은 세조의 조카영순군의 집에서 치러졌고, 세조와 정희왕후는 궁궐 안에 다락을 만들어 큰손자의 혼인을 멀리서 구경했다.[1] 월산군과의 혼인으로 상원군부인(祥原郡夫人) 박씨(朴氏)에 봉해졌다가, 후에 시동생 자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하면서 승평부부인으로 승격되었다. 월산대군과의 사이에서 소생은 없고, 월산대군은 후실 사이에서만 두 아들을 두었다.
박씨는 미모가 출중한 여인으로 그녀를 둘러싼 추문도 많았다.[3] 연산군은 어릴 때 잔병치레가 잦아 백부인 월산군의 집 덕수궁에 자주 피접을 나갔고, 그를 손수 길러준 박씨는 연산군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3] 후에 연산군은 보위에 오르자 자신의세자도 박씨에게 기르게 하고 세자가 커서 궁으로 돌아올 때 박씨도 같이 들어오게 했다.[3] 연산군은 박씨에게 많은 물품을 하사하고인수대비에게 효도를 했다는 이유로 정려문도 지어 주었다.[4] 그는 박씨에게 처소를 내어주고 자주 처소를 방문했는데 이 때문에 연산군이 박씨와 간통을 했다는 추문이 퍼지기도 하였다.[3] 또 연산군은 승평부부인의 당호 앞에 '大' 자를 넣어 승평부대부인이라는 도장을 만들게 하였다.[4] 또 다른 소문으로는 이후 연산군이 박씨와 자다가 꿈에 월산대군이 나타난 것을 보고 놀라 월산대군의 묘에 긴 창을 꽂게 했다는 소리까지 있었다.[3] 이처럼 박씨가 시조카인 연산군에 의해 겁탈당하였다는 소문은 당시에 파다했다. 그 뒤 박씨는 반정이 일어나기 전에 죽었는데,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는 설도 있다.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사람들이 이를 두고 연산군의 아이를 잉태하여 자결했다고 말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야사에선 연산군에게 성병을 옮아 자결하였다고도 한다.[5] 그러나 이에 대해선 당시 박씨는 쉰을 넘긴 나이였으므로 아이를 가져 자결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3][6] 중종반정의 주모자였던박원종이 자신의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누이와 연산군 간의 사건을 조작하여 소문을 퍼뜨렸다거나, 불심이 깊었던 박씨가 당시 유교 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