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정옹주 | |
|---|---|
| 옹주 | |
| 부왕 | 중종 |
| 이름 | |
| 휘 | 수환(守環) |
| 신상정보 | |
| 출생일 | 1525년 |
| 출생지 | 조선 |
| 사망일 | 1564년 |
| 사망지 | 조선 |
| 국적 | 조선 |
| 왕조 | 조선 |
| 부친 | 중종 |
| 모친 | 숙의 김씨 |
| 배우자 | 능창위(綾昌尉)구한(具澣) |
| 자녀 | 3남 3녀 |
| 묘소 | 경기도고양시덕양구 대자동 |
숙정옹주(淑靜翁主,1525년 ~1564년)는조선의왕족이다. 조선 제11대왕중종의 8녀이자 서5녀로 생모는숙의 김씨이다.
중종의 서녀로, 숙의 김씨의 유일한 딸이다. 1525년(중종 20년)에 태어났으며, 10세 때인 1534년(중종 29년)능성 구씨구한(具澣)[주 1]과 혼인하였다. 이후 구한은 능창위(綾昌尉)에 봉해졌다[1][2].연산군의 딸휘신공주의 남편구문경은 구한의 넷째 삼촌이며 친할머니는영응대군의 딸길안현주이다.
1534년(중종 29년) 음력 7월 20일 약 100여 년간 훈련장으로 사용된 국유지인 광주의 정금원의 땅을 달라고 요청하여 받았다가사헌부의 상소로 다시 국가에 환납하였다[3]. 또 1538년(중종 33년)에는 옹주의 집의 크기가 규정에서 6칸을 초과하는 바람에 중종의 명으로 허물었는데, 그 규모만 줄이고 담장 등에 부리는 사치는 하나도 줄지 않았다 하여 계속해서 비판을 받았다[4].
한편 숙정옹주는 남편 구한이 죽고 난 후 사위와 간통을 저질러 1564년(명종 19년)문정왕후에 의해 40세의 나이로 사사되었으며, 무덤은경기도고양시덕양구 대자동에 있다[5][6]. 구한과의 사이에서 3남 3녀를 낳았으며[7], 장남구사근은 명종에게 벼슬을 제수받았다[5].
숙정옹주가 사사된 그 해의 실록 기사에는 그가 사위와 간통한 것과 사사한 기록이 실리지 않았으나,1566년(명종 21) 그의 아들 구사근(具思謹)이 처음 관직을 얻는 기사에 어느 사관이 이 사실을 수록하여 후대에 전하게 되었다. 숙정 옹주(淑靜翁主), 중종(中宗)의 후궁인 숙의(淑儀) 김씨(金氏)의 소생이다. 능창위(綾昌尉) 구한(具澣)에게 시집갔었는데, 한이 죽자 그 사위와 간통하여 대내(大內)로부터 사약(賜藥)을 내려 죽였다(卒淑靜翁主 【中宗後宮淑儀金氏之出也。歸於綾昌尉具澣。澣死奸其壻, 自內賜藥而死。[8])고 간략히 수록했다.
묘소는경기도고양시덕양구대자동 산29-1에 남편 구한의 묘와 나란히 있다.문종의 딸경혜공주묘,정종의 단소 뒤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