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생몰연도) | 증명사진 | 전당대회 | 최고권력 유지 시기 | 비고 |
|---|
블라디미르 레닌 (1870년–1924년)[8] |  | 제11차–제12차 | 1922년 12월 30일[8] ↓ 1924년 1월 21일†[9] | 인민위원평의회(소브나르콤)주석으로서 권력을 장악한 레닌은볼셰비키의 사실상 지도자이기는 했으나 그 "지도자"임이 공식적으로 명시된 것은 아니었다.[8] 1917년부터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SFSR) 주석을, 1922년부터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 주석에 재임하였고, 1924년 죽을 때까지 집권했다.[10] |
|---|
 |  |  | 1922년 5월[11] ↓ 1925년[12] | 블라디미르 레닌이뇌졸중을 일으키자 삼두체제가 성립되어 레닌의 유고를 대신했다. 삼두체제는레프 카메네프,이오시프 스탈린,그리고리 지노비예프로 이루어져 있었다. 1925년 카메네프와 지노비에프가 스탈린과 결별하고레프 트로츠키에게 가담하기로 하면서 삼두체제는 붕괴되었다[12] 이후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트로츠키는 모두 스탈린에게 살해당한다. |
|---|
레프 카메네프 (1883년–1936년)[13] | 이오시프 스탈린 (1878년–1953년)[9] | 그리고리 지노비에프 (1883년–1936년)[14] |
|---|
이오시프 스탈린 (1878년–1953년)[9] |  | 제13차–제19차 | 1924년 1월 21일[9] ↓ 1953년 3월 5일†[15] | 1922년서기장에 취임한 스탈린은 1934년 서기장직에서 퇴임하고 서기장직 자체도 1952년 10월 폐지되었지만 죽을 때까지 당권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16] 스탈린은 1941년 5월 6일정부수반인인민위원평의회 주석에 취임했고 1946년 인민위원평의회를장관평의회로 개칭한 뒤 1953년 3월 5일 죽을 때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15] 또한 1941년 7월 19일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국방성 장관을 지냈으며독소전쟁 당시국가보위위원회 주석을 지냈고[17] 1921년–23년 사이에는민족문제인민위원회의 유일한 위원장을 지냈다.[18] |
|---|
 |  |  | 1953년 3월 13일[19] ↓ 1953년 6월 26일[20] | 스탈린이 죽자게오르기 말렌코프,라브렌티 베리야,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삼두체제를 꾸렸다.[21] 말렌코프가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영합하여 베리야를 체포 및 처형함으로써 삼두체제가 끝났다.[22] |
|---|
라브렌티 베리야 (1899년–1953년)[19] | 게오르기 말렌코프 (1902년–1988년)[19] |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1890년–1986년)[19] |
|---|
게오르기 말렌코프 (1902–1988)[23] |  | 제19차 | 1953년 3월 5일[23][19] ↓ 1955년 2월 8일[24] | 스탈린의 직함을 모두 계승(서기장직은 스탈린이 죽기 1년 전에 전에 폐지했기 때문에 예외)했으나 불과 1개월만에 그 직위들에서 모두 사퇴해야 했다.[25] 말렌코프는 서기장인 아닌장관평의회주석으로서 권력을 장악했으며, 제1서기 흐루쇼프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실각했다.[26] |
|---|
니키타 흐루쇼프 (1894년–1971년)[22] |  | 제20차–제22차 | 1955년 2월 8일[22] ↓ 1964년 10월 14일[27] | 1953년부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제1서기를 지냈고, 말렌코프를 쫓아낸 뒤 1958년 3월 27일부터 장관평의회 주석을 겸임하여 1964년 10월 14일 실각할 때까지 두 직함을 겸임했다.압하지야에서 휴가를 보내던 도중최고 소비에트 상임간부회주석레오니트 브레즈네프에게 1964년 10월 13일자 상임간부회 회합에 참여하라는 호출을 받았다. 흐루쇼프가 회합에 참여하자 공산당 간부들은 1957년의 "반당집단" 위기 이후 가장 극렬한 비판을 쏟아내었고, 흐루쇼프는 그 자리에서 모든 공직에서 실각하고 야인이 되었다.[28] |
|---|
 | |  | 1964년 10월 14일[27] ↓ 1977년 6월 16일[29] | 흐루쇼프 실각 이후 브레즈네프가 제1서기,알렉세이 코시긴이 정부수반,아나스타스 미코얀이 국가원수에 취임하는 집단지도체제가 꾸려졌다. 이후 미코얀이 실각하고 그 자리를니콜라이 포드고르니가 대신했다. 초기에는 권력을 똑같이 나누어 가졌지만, 브레즈네프의 권력이 점점 확대되었고 1977년 브레즈네프가 포드고르니를 실각시키고 국가원수와 서기장을 겸임하게 되자 삼두체제는 해체되었다.[29] 그러나 포드고르니가 축출된 뒤에도 브레즈네프의 나머지 치세 동안 집단지도체제는 형태만 바뀔 뿐 그 본질은 그대로 존속했다.[30] |
|---|
알렉세이 코시긴 (1904년–1980년)[27]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1906년–1982년)[27] |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1903년–1983년)[27] |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1906년–1982년)[27] | | 제23차–제26차 | 1964년 10월 14일[27] ↓ 1982년 11월 10일†[31]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재임했으며 이후 명칭을 "서기장"으로 되돌렸다.[32] 1970년대까지는 정부수반알렉세이 코시긴과 동격으로서 권력을 나눠 가졌다. 이후 권력을 강화하면서 국가원수직인 최고 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주석을 겸임하게 되었고 코시긴의 권력을 압도했다.[29] |
|---|
유리 안드로포프 (1914년–1984년)[33] | | — | 1982년 11월 12일[33] ↓ 1984년 2월 9일†[34] |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으로서 권력을 장악했고,[35] 1983년 6월 16일부터 1984년 2월 9일 죽을 때까지 최고 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주석을 겸임하였다.[36] |
|---|
콘스탄틴 체르넨코 (1911년–1985년)[37] | | — | 1984년 2월 13일[37] ↓ 1985년 3월 10일†[32] |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으로서 권력을 장악했고,[38] 1984년 4월 11일부터 1985년 3월 10일 죽을 때까지 최고 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주석을 겸임하였다.[39] |
|---|
미하일 고르바초프 (1931년– 2022년)[40] |  | 제27차–제28차 | 1985년 3월 11일[32] ↓ 1991년 8월 19일[41] | 1985년 3월 11일 서기장에 취임하여[39] 1991년 8월 24일 사퇴했다.[42] 1988년 10월 1일부터 최고 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주석을 겸임했고[38] 1989년 5월 25일 최고 소비에트 주석으로 개칭하여 1990년 3월 15일까지 재임했다.[39] 최고 소비에트 주석을 폐지하고 신설한소련 대통령직에 1990년 3월 15일부터[43] 1991년 12월 25일까지 재임했다.[44] |
|---|
겐나디 야나예프 (1937년–2010년) (찬탈자) | | 8월 쿠데타 | 1991년 8월 19일 ↓ 1991년 8월 21일 | 1991년8월 쿠데타 때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통해 권력을 잡았다. |
|---|
미하일 고르바초프 (1931년– 2022년)[40] |  | - | 1991년 8월 21일[32] ↓ 1991년 12월 25일[41] | 8월 쿠데타로 인해 서기장직에서 사퇴하고 대통령 직함만 유지하게 되었다. 1991년 12월 25일 대통령에서마저 사퇴했고, 그 날 소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4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