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영어:Seoul Metropolitan City)는 사실상대한민국의수도이자 문화·인문·정치·경제 중심지 역할을 하는 도시로,경기도와인천광역시까지 아우르는수도권의 중심지 기능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특별시로 지정된 도시이고 종주 도시(제1의 도시) 기능을 하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으나 본 역사는백제 첫 수도인위례성을 시초로 한다.삼국시대에는 전략적 요충지로서고구려,백제,신라가 번갈아 차지하였으며,고려 시대에는 왕실의 별궁이 세워진남경(南京)으로 개칭하였다.
유교의도성제에 따라 한성에경복궁과종묘,사직,육조거리와시전을 세우고 이를 둘러싼한양도성을 갖추어 수도로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세도정치 때는명문가들이 종로에 거주하였다.임진왜란과병자호란 등의 전란을 거치며 일부가 훼손되었으나 500년 넘게 조선의 수도이자 중심으로 기능하였다.
중앙으로한강이 흐르고,북한산,관악산,도봉산,불암산,인릉산,청계산,아차산 등의 산들로 둘러싸인분지 지형의 도시이다. 면적은 605.23 km2로대한민국 면적의 0.6%이고, 인구는 9,334,828만 명으로 대한민국 인구의 17%를 차지한다.[4]시청 소재지는중구이며, 25개의자치구가 있다.인구가 가장 많은 구는송파구[5]이며 가장 인구가 적은 구는중구[6]이다. 대한민국의 총생산 가운데 절반을 차지하는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는 지역으로 2018년 서울의 지역 내 총생산은 422조 원이었다.[7][8]
수도로서의 오랜 역사와 더불어 전통 건축과 명소가 밀집해 있는 도시로서경복궁을 비롯한조선의 5대 왕궁이 이곳에 위치해 있으며,창덕궁,종묘,조선왕릉의 총 세 곳이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근현대 건축 역시 수많은 명소가 자리해 있으며 대표적으로YTN서울타워,63빌딩,롯데월드타워,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롯데월드,코엑스,파크원 등이 있다. 이와 더불어 오늘날대한민국의 문화산업을 주도하는 도시로 자리잡고 있다. 서울특별시에는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의 센터가 이곳에 위치해 있으며, 여의도에는국회의사당이 위치해 있다.
"서울"의 어원에 관해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나,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수도를 뜻하는신라 계통의 고유어인서라벌에서 유래했다는 설을 유력하게 받아들이고 있다.[9] 이때 한자 가차 표기인 서라벌 원래 의미에 관해서도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삼국사기 등에서서라벌을금성으로도 표기했다는 점과신라까지 포함하여 "설[새: 新, 金]-벌[땅: 羅, 城]", 즉새로운 땅이라는 뜻으로 새기는 견해가 있다. 고대-중세한국어에서 서라벌에 관한 정확한 발음을 확실하게 확인한 게 없으며, 그 발음은훈민정음 창제 후 "셔ᄫᅳᆯ"이라는 표기가 등장하고 나서 알게 되었다.
서울 한자 음차 표기로는이십일도회고시,한경지략,증보문헌비고[10]의 서울(徐菀),동사강목,북학의의 서울(徐蔚),대동지지의 서울(徐鬱),앙엽기의 서올(徐兀) 등이 있다.[11] 이처럼조선 시대 서울은한양,한성(漢城) 외에도 서울(셔ᄫᅳᆯ), 경도(京都), 경부(京府), 경사(京師),경성(京城), 경조(京兆)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김정호의수선전도에서 알 수 있듯 수선(首善)으로 표기한 예도 있다. 이 가운데 한양과 한성을 제외하면 모두수도를 뜻하는 일반 명사로서 '서울'이 원래는 서울 지역(사대문 안과성저십리)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수도를 뜻하는일반 명사였다는 방증이다.
서울이라는 단어는한국어에서 일반명사로도 사용된다.국어사전에서는 일반 명사 '서울'을 '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고, 경제, 문화, 정치 등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도시'라고 정의하고 있다.[12]
1910년 10월 1일에일제가한성부를경성부로 개칭함에 따라일제강점기에 서울은 주로 경성으로 불렸으나, 1945년 광복 후, 경성부에서 서울특별자유시로 개칭되면서,경성 대신에서울로 부르게 되었다.[13]
서울 로마자 표기 'Seoul'은19세기 프랑스선교사들이 서울을 쎄-울(Sé-oul)로 표기한 데서 비롯했다. 오늘날프랑스에서는 서울을 'Séoul'로 표기하고,스페인어권에서는 'Seúl'로 쓰나 모두 '쎄울'로 읽는다. 또,영미권에서는 일반적으로 'Seoul'로 쓰고 영혼을 뜻하는 단어 'Soul'처럼 '쏘울'로 읽는다. 서울시에서는 이러한 점을 착안하여오세훈 서울시장 재임 기간인 2006년 11월 13일 서울시 서브슬로건(Sub slogan)을 《Soul of Asia》로 지정하였다.
서울은순우리말 지명이기 때문에 서울이라는 한자가 존재하지 않아서 이전중국에서는 서울을 한청(중국어간체자:汉城,정체자:漢城,병음:Hànchéng, 한성)이라 불렀고, 1988년 서울올림픽도 한성올림픽이라고 불렀으나, 2005년에 서울시가 서울과 발음이 유사한 '셔우얼'(중국어간체자:首尔,정체자:首爾,병음:Shǒu'ěr, 수이)을 서울 공식적인중국어 표기로 정하면서 점차 이 표기가 확산되어 가는 추세다. 일본어 표기는 '소우루'(ソウル)다.
해방 이후에는미군정청 문서에서, 서울특별시 영문 공식 명칭은 'Seoul Independent City'였다. 직역하면 "서울독립시"이나,독립시라는 표현이 어색하다는한국어 관점에 따라 "특별시"(영어:special city)로 번역한 게 굳어져 'Seoul Special City'로 되었다. 하지만 서울특별시청 홈페이지에서 서울특별시 공식 영어 명칭은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이다.[14]
조선 태조는 1392년개경에서조선을 건국하고, 1394년 10월 남경으로 천도했다.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데에는풍수사상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나, 한양의 도시계획 자체는 유교 이념에 바탕을 둔도성제에 따라 건설되었다. 이듬해 1395년에는한성부로 개칭하고 5부(部) 52방(坊)의 행정 구역을 확정했다. 한성부의 지리적 범위는 사대문 안 도성과 도성 밖 10리(약 4 km)까지의성저십리(城底十里)로 구성되었다. 1398년숭례문을 완공하였고, 1404년경복궁을 준공하였다.[15]
1592년임진왜란이 발발하자조선 선조는 천도를 결정하고의주로 피난하였다. 1592년 5월 일본군에게 점령된 한양은 이어진 혼란 속에서경복궁,창덕궁 등 주요 궁궐이 화재로 소실되는 일을 겪었다. 이후 1637년에도병자호란 등 전란을 거치며,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후에 서서히 재건되었다.
1896년환구단에서대한제국을 선포한고종황제는 정부와 함께 기존 법궁인경복궁과종각을 중심으로 하던 것에서 벗어나경운궁을 중심으로 공간구조의 개편을 꾀하는 '한성 도시개조사업'을 실시하였다. 1895년부터 1903년까지 실시된 이 사업은 기존의 좁은 도로를 확장 정비하여 원활한 교통로 확보와 위생 개선을 동시에 꾀하였으며, 근대국가의 수도로 거듭나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16]
1910년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일본 제국은 한성부를경성부로 개칭하고경기도에 예속시켜 지위를 격하시켰으며,조선 통감부와조선총독부의 청사를 경성부에 두었다. 1911년 경성부의 하부기관을 5부 8면으로 구분하여 성 안은 동·서·남·북·중의 5부로, 성 밖은 용산·서강·숭신·두모·인창·은평·연희·한지의 8개 면으로 구분하였다.
1914년 면(面) 제도를 폐지하고 부제(府制)를 실시하면서 용산·숭신·인창·한지·두모면의 일부를 경성부에 편입시키고, 명칭은 정(町)으로 바꾸었다. 1936년고양군·시흥군·김포군의 일부 면들이 편입되어 행정구역이 133.94km2로 확장되었다. 1943년에는 구제를 실시하여,중구·종로구·동대문구·성동구·서대문구·용산구·영등포구 등 7개 구로 나누었다.
일제는 조선 개국 이후로 존재했던 서울의 역사성과 공간구조를 대대적인 정비계획에 따라 훼손시켰다.1908년 전차선로 가설을 위해 성곽의 일부가일본군에 의해 철거된 것을 시작으로,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도성의 성문이나 성벽 일부를 훼손하고 신작로나 철로가 개설되어 나갔다.
1945년광복과 함께 경성부는 서울시로 개칭되었다. 1946년 9월 28일에경기도에서 분리하여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하였다.[17] 이는 1949년 8월 15일 서울특별시로 다시 개칭되었으며, 고양군 뚝도면·숭인면·은평면과 시흥군 도림리·구로리·번대방리 등이 편입되어 시역이 268.35 km2로 확장되었다.
1950년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대한민국 정부는 수도를부산으로 이전하였고, 6월 28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처음으로 점령하여 임시수도로 삼았다. 9월 28일에대한민국이수복하였으나,1.4 후퇴 때 다시 서울을 내주고 폐허가 되었다. 1951년 3월 14일에 다시 서울을 수복한 뒤 1953년정전 협정까지 대한민국의 점령지로 남았다.
1962년 서울특별시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국무총리 직속기구가 되었고,시장의 행정적 지위도장관급으로 격상되었다. 같은해 경기도 광주군·양주군·시흥군·김포군·부천군의 7면 54리를 편입하고 시역을 대규모로 확장하여 593.75 km2가 되었다. 이 때 이른바 강남 등 서울의한강 이남 지역인강남 (서울)이 대거 편입되었고,[18]한강 이북에서는 동북부의도봉구,노원구,중랑구 일대가 편입되었다.
동서 간의 거리는 36.78 km, 남북 간의 거리는 30.3km이며, 면적은 약 605.25 km2이다. 서울의 면적은 대한민국의 0.6%이며 남북한 면적의 0.265%이다. 서울특별시의 최북단은도봉구도봉동이고 최남단은서초구원지동이며 최동단은강동구강일동, 최서단은강서구오곡동이다.
서울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북한산(삼각산)을 최고점으로 한 고양·양주구릉과 경기평야가 만나는 지대에 있다. 주위에는 북한산(836m)·도봉산(717m)·인왕산(338m)·관악산(629m) 등 500m 내외의 산과 구릉이 자연성벽과 같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이다.광주산맥의 한 줄기인 도봉산은 백운대·인수봉·노적봉의 3개 봉우리가 솟아 있는 북한산과 이어져 있고, 그 산줄기는 다시 남으로 뻗어북악산(342m)을 솟게 하였다. 그리고 북악산에서 동으로 뻗은 산줄기에 낙산(125m), 서로 뻗은 산줄기에 인왕산이 있다.
인왕산에서 뻗은 산줄기 중 남쪽으로 뻗은 것은숭례문을 지나남산(265m)·응봉(175m)과 이어져 있고, 서쪽은 무악재의 안부(鞍部)를 지나 안산(296m)과 이어져 있는데 모두 구릉성 산지이다.한강 남쪽에는 100m 이하의 구릉지가 펼쳐져 있고, 남쪽에 천연의 요새와 같이 서울의 외곽에 솟아 있는관악산(629m),청계산(618m),구룡산(306m),우면산(293m) 등이 있다. 그 외에 서울 동부에불암산,수락산,망우산,아차산 등이 있다.[19]
서울의 중심에는한강 하류가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하류이기 때문에 구배는 완만하며 물의 흐름은 느리나,홍수 때는 상·중류의 유역 지방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 때문에 수위가 높아진다.여의도는 상류로부터 운반되어 온 토사가 퇴적된하중도이다. 한강물은 서울시민의수돗물로도 공급되는데, 과거에는뚝섬과선유도 등에도 취수장이 있었으나 현재는잠실 수중보와팔당 저수지로부터 물을 끌어들여 공급하고 있다.[19]
서울의 임야 면적은 2006년을 기준으로 157.35 km2으로, 임야의 51.5%는 국공유림이고 49.5%는 사유림이다. 임야의 분포는 산이 많은노원구에 17.73 km2,관악구에 17.53 km2,강남구에 16.11 km2가 있어서 전 임야의 32.6%를 차지하고 있다. 이 임야의 많은 부분이 개발 제한 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임야는 잘 보호되고 있는 편이긴 하지만, 임야 면적은 매년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20]
서울 도심 주변에는 도심을 관통하는청계천의 계속된 침식으로북악산과 남산에서 산기슭이 발달되어 기복이 많은 지형이 되었다.을지로에 있던 구리개,조선일보사 앞의 황토현(黃土峴)이란 기복은 가로공사와 도시개발에 따라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으나, 현재도율곡로·퇴계로·을지로 곳곳에서 기복을 찾아볼 수 있다.[19] 이러한 기복 때문에 이 지역에는 고개 또는 현(峴)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이러한 지명에는 충무초등학교 부근의 풀무고개 또는 대장고개(治峴), 인현(仁峴)·종현(鍾峴)·진고개(泥峴), 계동(桂洞) 일대에 관상감현(觀象監峴), 가회동 일대에 맹현(孟峴)·홍현(紅峴)·안현(安峴)·송현(松峴)·배고개(梨峴) 등이 있다.[19]
풍수설에 따라 북악산 기슭에는경복궁·창덕궁·창경궁·종묘, 인왕산 기슭에는덕수궁을 지었고, 궁궐 사이는 궁인(宮人)·귀족·고관 들의 저택지로 이용하였다. 이 지역의 침식으로 운반된 토사는 청계천 연안에 퇴적되어 평탄한 시가지를 형성하게 하였다. 따라서 도심지에서 가장 평탄한 곳은 청계천 북쪽의 연안으로동대문에서세종로 사이의종로이며, 이곳에서는 지형의 기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19] 삼각지로부터 해발고도 20m의 갈월동을 지나면 지형이 차차 높아져서서울역 앞에 오면 더욱 높아지기 시작하고,숭례문 부근은 해발고도가 40m 내외가 된다. 이곳은 분수계(해발 36.6m)가 되어, 동으로는청계천이 동으로 흘러중랑천과 합류한다.[19]
선캄브리아기의 암석 중 가장 주된 것은 서울 지질도폭(1982)의 호상흑운모편마암(PCEbngn; Precambrian biotite gneiss)이다.[22] 지형적으로 저지대를 이루면서강서구화곡동,서대문구,마포구,용산구,은평구,영등포구,동작구,강남구,서초구 등지에 분포한다. 이 암석은경기편마암복합체의 일부로서, 이 지역 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암석으로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다.[22] 서울 동부지역으로 가면선캄브리아기의 암석이 조금 더 세분화되어,논현동 일대에 분포하는 안구상 편마암(PCEagn)이나강남구,송파구,강동구 일대에 흩어져 분포하는 운모편암(PCEms) 등으로 분류된다.[23]
중생대의화강암인 서울 화강암(Jsgr; Jurassic Seoul granite)은 서울시 북부인중구,동대문구,성북구,종로구,노원구,북한산 지역에 분포한다. 이 화강암은대한민국에서 가장 넓게 분포하는 주요 화강암인대보 화강암의 일부이며,선캄브리아기의편마암류를 관입하고 있다.[21][22] 박병권(1972)에 의하면 서울 화강암의 Rb-Sr 절대연령은 160±10 Ma로 중기쥐라기에 해당한다.[24] 서울 화강암의 최대 압축 강도는 1100~1440 kg/cm2이며 서울 화강암 내에단층과절리를 생성시킨 압력은 평균 1200 kg/cm2이다.[25]
화강암은 조립질이면서 다른 암석과는 다르게절리(節理)가 잘 발달하고 풍화작용에 약하며,도봉산·백운대·인수봉과 같은 봉우리가 기암절벽을 만들어 서울 특유의 절경을 보여 주고 있다. 홍제동·안암동·창신동·장위동 등지의 화강암은 1990년대까지만 하여도 건축재로 쓰이곤 했다.[28] 화강편마암은 견고한 암석이지만 접착성이 적기 때문에 쉽게 붕괴되어 봉우리를 이루지 못하나, 작은 기복을 이룬 노년기 지형을 나타내주고 있다. 특히 동작동 부근의 화강편마암은 판형으로 쉽게 벗겨져 온돌의 구들장으로 쓰였고, 화강편마암이 풍화되어 된 천호동의 점토는 벽돌과 옹기 제조의 원료로서 많이 쓰였다.[28]
서울은냉대 동계 소우 기후[30](쾨펜의 기후 구분Dwa)[31] 또는온대 하우 기후(Cwa)에 속하며,습윤 대륙성 기후로 분류하기도 한다. 기온의 연교차가 큰대륙성 기후이다. 최근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온 상승으로 인해 최한월 평균기온이 영하 3 °C보다 높은 -2.4 °C로 높아져 대한민국 기상청은온대 하우 기후로 변경했다. 그러나 이는 열섬 현상으로 인한 것으로 외곽 지역은 여전히 -3 °C 미만으로 내려간다는 점과 냉대 기후의 최한월 평균기온 기준을 0 °C 미만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많다는 점에서 온대기후와 냉대기후의 중간 정도 되는 기후이다. 여름 기온과 겨울 기온의 연교차가 28.1 °C로 매우 크기 때문에, 겨울은 매우 춥고, 여름은 몹시 무덥다.
최근 30년(1991년~2020년) 기준으로 서울의 연평균 기온은 12.8 °C 이고, 최난월인 8월 평균 기온은 26.1 °C, 최한월인 1월 평균 기온은 -1.9 °C이다. 특히 최한월의 평균 기온은 같은 위도 상의 다른 도시에 비해 낮은 편이다. 시내의 기온 분포는중구와 같이 가옥이 밀집한 곳과 많은 자동차가 배기가스를 뿜으며 지나는 간선도로, 그리고 도심부의 포장도로가 지나는 지역이 가장 기온이 높고,한강 연안과 가옥의 밀집도가 낮은 지역은 기온이 낮게 나타나고 있다. 도심의 기온은 여름철의 6, 7, 8월 3개월을 제외하고는 해가 거듭될수록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이 상태로 계속 기온이 높아진다고 가정하면 약 100년 간에 평균기온은 1.8 °C, 일 최저 기온의 연평균치는 3.1 °C씩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시내의 습도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28]
계절은여름이 가장 길고 그 다음겨울,봄 순서대로이고가을이 가장 짧다. 봄은 3월 중순부터 시작되는데 월평균 기온이 5 °C 이상으로 올라가고 날씨는 맑고 따뜻해진다. 그러나제트기류가 서쪽에서 불어올 때황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여름은 20 °C 이상의 기온이 계속되며 7, 8월에는 30 °C 내외, 심하면 35 °C 이상의 무더운 날씨가 많다. 또한장마나집중호우가 계속되어 많은 비가 내리므로 홍수의 피해가 크다. 가을은 하늘이 높고 맑은 날이 계속되며, 기온은 차차 내려가 선선한 날씨가 시작된다.겨울은 최저 기온이 0 °C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100일 내외, 최저기온이 -10 °C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29.4일로서, 추운 날이 비교적 오래 지속되고 있다. 눈이 내리는 기간은 12.5일, 얼음이 어는 기간은 16.4일이나 강수량은 여름에 비하면 훨씬 적어 건조한 날씨가 많다. 최근 30년(1991년~2020년) 기준으로 연평균 강수량은 약 1,417.9mm이나,1990년에는 2,355.5mm,1949년에는 633.7mm가 내릴 정도로 연 강수량의 기복이 심한 편이다. 계절별 강수량은 여름철에 892.1mm, 겨울철에 67.3mm로 여름철에 강수가 크게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한반도는 계절풍 지대에 속하기 때문에 서울은 여름에 남동풍, 겨울에 북서풍이 빈번하게 분다. 도심부에서 도로 위를 부는 도로바람은 남산의 북사면에서 발달한 차가운 공기가 충무로 지하상가 위를 지나 을지로 입구 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퇴계로 2가 부근에서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분다.
역대 최저 기온은 1927년 12월 31일의 -23.1 °C, 역대 최고 기온은 2018년 8월 1일의 39.6 °C이다.
시내에는 큰 건물과 공장의 굴뚝에서 내뿜는 매연, 자동차의 배기가스 등의 오염물질이 늘어나면서 태양광선이 제대로 땅에 닿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시내에 내리쬐는 일사량은 매년 감소되어 가고 있다. 비행기나 높은 산 위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면 연기와 먼지를 품은 오염대기층인연진모자가 상공을 덮고 있어 서울 시야를 나쁘게 하고 있다.[28] 2011년 환경부가 7대 도시의 대기 오염물질을 조사한 결과, 전국의 미세먼지 평균농도는 51㎍/m3이고, 서울의 미세먼지 농도는 49㎍/m3로 나타났다. 2013년을 기준으로 하여 서울시는 전국 16개 지방(서울,부산,대구, 경기, 제주, 전남 등)에서 8위(7위:대구 9위: 전북)를 하였고, 광역시나 특별시 중에서는 4위(3위:대구 5위:울산)를 하였다.(중위권) 그러나 최근, 수년 동안 서울시에서는 청정연료 확대보급, 경유자동차 저공해화, 도로비산먼지 청소, 공사장 비산먼지 관리 등과 같은 대기질 개선활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해 오면서 대기질이 좋아지기 시작했으나,황해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중국의 수많은 공장에서 뿜어져나오는 매연에 서울의 대기질은 겨울과 봄에 최악을 기록하고 있으며, 미세먼지 농도가 100㎍/m3을 훌쩍 뛰어넘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출처 필요]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로서,입법부·행정부·사법부 등 국가의 통치 기관이 집중되어 있다. 종로구에는청와대와정부서울청사를 비롯한 중앙 행정 기관과헌법재판소 등 국가 중요 기관이 있고, 중구 정동에는 각국의 외교대사관이 밀집해 있다. 또한 여의도에는국회가, 서초구에는대법원을 비롯한 법조 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대한민국 국회에서의선거구의 경우,22대 국회의원 선거 기준 48개 선거구로 나뉜다. 주민등록 인구(외국인 제외)에 따라 29만5천 명 미만인 자치구는 1개, 29만5천 명 이상 ~ 59만 명 미만인 자치구는 2개, 59만 명 이상인 자치구는 3개의 선거구를 가진다.
고려 멸망 후조선이 천도(1394년)한 후조선 태종 때 인구는 약 10만 명이었으며, 이후 1900년대까지 20만 명 선을 유지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서울의 인구는 지방 인구의 도시 집중 현상으로 급격히 증가하여 과밀화 현상을 보였다.1919년 서울의 인구는 25만 명, 인구밀도는 6,874명/km²였으나,1925년에는 인구 34만 명, 인구밀도 9,297명/km²,1930년에는 인구 33만 명, 인구밀도 9,824명/km²,1935년에는 인구 40만 명, 인구밀도 11,172명/km²에 달하였다. 이에 따라1936년 시역을 확장하였으며, 그 결과 인구는 73만 명으로 증가하였으나 인구밀도는 5,430명/km²로 낮아졌다.
1945년 광복 당시 인구는 90만 명, 인구밀도는 6,628명/km²였으나, 해외에서 귀국한 동포와 한반도 북부 출신 인구의 유입으로1946년에는 인구가 127만 명으로 급증하였고, 인구밀도는 9,309명/km²에 이르렀다.1948년에는 인구 171만 명, 인구밀도 12,055명/km²였으며,1949년에는 서울의 면적이 136.05 km²에서 268.35 km²로 확장되어 인구는 142만 명, 인구밀도는 5,284명/km²로 조정되었다.
1951년한국 전쟁의 여파로 인구는 65만 명, 인구밀도는 2,416명/km²로 급감하였다. 그러나1953년 휴전과 함께 환도가 이루어지면서 인구가 다시 급증하기 시작하였다.1955년에는 인구 157만 명, 인구밀도 5,869명/km²,1960년에는 인구 245만 명(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10%), 인구밀도 9,133명/km²에 달하였다. 이어1970년에는 인구 543만 명(전체 인구의 18%), 인구밀도 9,013명/km²,1980년에는 836만 명, 인구밀도 13,074명/km²,1990년에는 1,061만 명, 인구밀도 15,532명/km²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특히 농어촌 지역의 청년층과 생산가능 인구가 대거 수도권으로 이주함에 따라, 지방은 상대적으로 인구 구조의 불균형이 심화되었다.경제 성장 시기인1970~80년대에는 서울 및 수도권 공업지대와 신도시 개발 지역이 주요 인구 흡수처로 기능하였다. 그 결과전라도,경상도,충청도의 일부 농촌 지역은 이미1980년대부터 인구 감소세가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서울의 인구는1992년 1,099만 명, 인구밀도 19,522명/km²로 정점을 기록한 이후 감소세로 전환되었다. 이는 정부의 인구 분산 정책에 따른 것으로, 서울 교외에분당,일산,평촌,중동,산본 등 1기 신도시가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이후운정,판교,동탄 등 2기 신도시 개발도 진행되면서 인구 이동이 가속화되었다.
서울의 인구는 감소세를 이어가다가2003년 1,028만 명, 인구밀도 16,975명/km²을 기록한 뒤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는데, 이는 ‘뉴타운’으로 불린 대규모 재개발 사업으로 인한 인구 유입의 영향이 컸다.2009년 12월 말 기준으로는 인구 10,464,051명, 세대 수 4,116,660, 인구밀도 17,289명/km²에 달하였다.
서울의 급격한 인구 증가는1960년대 이후경제성장에 따른 산업 발전과 고용 증대의 결과였으며, 농촌 인구가 대거 서울로 유입되면서 과밀화 현상이 심화되었다. 이는 자연 증가보다는 사회적 증가가 주요 요인이었다. 또한 서울에는 다수의교육기관이 밀집해 있어,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서울에서 취업과 정착을 하는 경향이 뚜렷하였다.
그러나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높은 주거비, 특히 전세 가격 상승으로 인해 서울의 인구 순유출 속도는 전국에서 가장 빠른 수준을 보였다.2016년 5월을 기점으로 서울의 인구는 1,000만 명 이하로 감소하였으며, 이는1988년서울 올림픽 개최 무렵 1,000만 명을 돌파한 이후 28년 만의 변화였다.2025년 3월 기준 서울의 인구는 933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이와 같은 인구 유출은 주로경기도로의 이동에 의한 것이며, 일부는세종특별자치시와제주특별자치도로의 이주로 이어져 역도시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서울의 공업은1919년에영등포에 세워진방직공장을 시초로 한다. 영등포에는 그 외에도 피혁공장과 철도공작창이 지어졌으며,1940년대 들어서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일본의 군수물자 조달을 목적으로 영등포와용산을 중심으로 군수 산업이 발달하였다.8·15 광복과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잠시 침체 상태에 있었으나,1962년부터 시작된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로 인해 서울의 공업은 급속도로 발달하였다.1971년 형성된구로동 수출산업공단은 섬유·전자기계·고무합성수지제품·금속·광학기기류 등의 생산으로 서울 최대의 산업단지가 되었으며, 인근의 영등포 기계공단과 묶여 경인공업지구를 형성하였다.
1990년대 초까지 용산·영등포·천호동·노원구 등에 공업지구가 형성되어 있었으나,수도권이 팽창하면서인천·시흥·안산·부천 등 인근 지역으로 옮겨갔다.2000년대 들어 첨단산업이 발달하면서 구로동·가산동 지역의 대규모 공단이 디지털산업단지로 탈바꿈하여 현재는 수많은 IT 벤처 기업이 있다.[39]
서울은 최근 K 문화의 인기로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어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다. 서울관광재단에서는 서울 여행을 계획하거나 서울을 여행중인 관광객들을 위해 '비짓서울'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시 공식 관광 정보 웹사이트인 '비짓서울'은 서울에서 개최되는 각종 행사, 축제, 전시 정보는 물론이고 명소, 맛집, 쇼핑 등 다양한 관광 정보를 제공한다. 특히,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관광 정보를 발 빠르게 제공하여 관광객들이 서울을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비짓서울'은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간체, 중국어 번체, 러시아어, 말레이어 총 7가지 언어를 제공한다.
서울에는 시립도서관 23개 소가 있으며, 시립 도서관의 경우 대부분서울특별시교육청에서 운영하고 있다. 그 외에도 각자치구에서 설립한 구립 도서관이 있다. 최근 구립 도서관의 숫자가 늘고 있는 추세이다. 장서(藏書) 100만여 권을 가진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 그외에도 공공 및 사립도서관, 대학도서관 등이 있다.[41]
롯데월드타워 - 롯데월드 옆 롯데월드몰 부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6번째로 높은 555m의 높이를 자랑한다.
롯데월드몰 - 국내 최대 규모의 복합 쇼핑문화센터로서, 롯데월드타워와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명소이다.
디지털미디어시티 - 서울 서북권에 위치한 미디어&엔테테인먼트 관련 업무지구이다. 주요 방송사가 입주할 예정이며, 창의적인 디자인이 돋보이는 다양한 형태의 건물이 있다. 줄여서 DMC(Digital Media City)로 불리며, 120층이 넘는부르즈 할리파에 이은 세계 2위의 초고층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다.
타임스퀘어 - 30만 m2(축구장 40개 넓이)의 국내 최대 복합 쇼핑공간이다. 타임스퀘어 내 CGV영화관은 세계 최대크기의 스크린을 갖춘 영화관이 있다. (영등포구 영중로 15)
동대문디자인플라자 - DDP(Dongdaemun Design Plaza)는 세계 최초의 '디자인-창조산업의 발신지' 이자, 서울의 미래 성장을 견인하는 '창조산업의 전진기지'를 위해 건립된 세계 최대 규모의 3차원 비정형 건물이다. 특히, 옥상에 위치한 LED 꽃밭이 명소로 유명하다.
홍익대학교 인근 - 서울 지역에서 인디 문화의 상징적인 지역이었으며, 특색있는 분위기와 여러클럽, 공연장 등이 모여있어 많은 젊은이들이 찾는번화가 중의 하나이다.
서울 올림픽 공원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위해 건설되어, 현재는 일반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사이클· 역도· 펜싱· 수영· 체조· 테니스 등 6개의 경기장 등의 경기 시설과 소마미술관 등 다양한 문화 시설들이 함께 있다. 올림픽 공원 건설 도중 발굴된 백제 유적지 몽촌토성은 공원 내에 있다.[46]
1899년부터 운행하던전차가1968년 없어지면서 서울의 대중 교통 수단은 변화를 맞이하였다.1966년부터는 시가지의 대폭적인 재개발로 건물의 고층화와 함께 도로의 입체화가 진전되었다. 대중 교통 수단의 재배치는 서울 도시 구조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쳐왔다. 대표적인 예로1기 지하철, 특히 당초 계획과는 달리 거대 순환선으로 변경된2호선이 서울의 공간에 끼친 영향을 들 수 있다.
서울에서버스가 처음으로 운행을 하기 시작한 때는1928년으로, '경성 부영버스'라는 이름으로 10대를 운영했다.1949년 17개 회사가 서울시로부터 면허를 받고 버스 운영에 뛰어들었다. 이후로 여러 차례의 확장과 개편을 거쳤으며,2004년 서울특별시 버스 개편으로 버스 준공영제와 환승할인 제도가 도입되었다. 현재시내버스,간선버스,마을버스,광역버스 등을 포함한 수백개의 버스노선이 시내를 연결하고 있다.
서울에서택시는1912년에 처음 운행을 시작하였고,1919년 최초의 택시회사가 설립되었으며,1926년에는 미터기가 도입되었다.8·15 광복 후에도 발전을 거듭하여1970년 콜택시가 등장하고[54],1988년에는 콜택시 대체용으로 도입된 중형택시[55], 1992년에는 모범운전수가 운전하고 콜택시를 도입하는 등 서비스 수준을 높인 모범택시가 선을 보였다.[56] 또한2009년에는 소형택시 부활이 결정된 이후2011년 12월부터 소형택시 70여대가 운행되고 있다.[57][58] 2015년 10월에는 고급택시가 운행을 시작했다.
서울은 한반도철도의 중심지 지역답게, 서울에서 다른 도시간을 잇는 철도 교통이 골고루 발달되어 있는 지역이다. 지역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역이 나뉘어 있어,서울역에서는경부선과경전선KTX,용산역에서는호남선·전라선·장항선,청량리역에서는중앙선·태백선·영동선강릉선열차가 출발한다. 그 외에도영등포역 등의 중간역에서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또한인천국제공항에서인천국제공항철도를 이용하여서울역까지 접근할 수 있다. 또한 철도관제센터 또한 서울에 위치해 있어 그곳에서대한민국 전역의 모든 철도를 총괄 관리 및 명령한다.
인천국제공항철도(AREX)는 한국의 관문인 인천공항에서 서울도심을 가장 빠르게 연결해 주는교통수단이며,인천국제공항 교통센터 지하 1층 승강장에서 서울역행 직통, 일반열차 탑승이 가능하다. 공항철도를 이용하여명동,홍대입구,동대문,DMC 등 주요 관광지에 빠르게 접근할 수 있다.
2007년 3월 23일 첫 운행을 시작한 공항철도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두 개의 국제공항(인천국제공항,김포국제공항)과 도심을 연결하는 철도이다. 2007년 3월 1단계 구간(인천국제공항역(현 인천공항1터미널역)∼김포공항역, 37.6 km)을 개통한 뒤, 2010년 12월 29일 2단계 구간(김포공항역∼서울역, 20.4 km)을 개통했으며 이어공덕역(2011.11.30)과청라국제도시역(2014.06.21),영종역(2016.3.26),인천공항2터미널역(2018.1.13)을 개통함으로써 인천국제공항철도 건설사업이 마무리됐다. 현재 서울역∼인천공항2터미널역 간 63.8km의 영업거리에 총 14개역이 있으며 서울역에서는 도심공항터미널을 운영하고 있다.
공항철도 열차는 서울역∼인천공항1터미널역을 무정차로 43분에 운행하는 고급형 열차인 직통열차와 모든 역에 정차하는 일반열차(56분 소요)로 이원화 운영되고 있다.서울역에 위치한서울역 도심공항터미널에서는 대한항공 등 9개 항송사 이용객들을 대상으로시내 체크인 및 수하물 탁송을 지원하며, 출입국관리사무소의 출국심사 서비스가 무료로 제공된다.
공항철도를 이용하는 고객들은 역간 거리가 길고 빠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63.8km 구간에 14개역이 위치해 있어 역간 평균거리가 5.3km에 달한다. 수도권 전철의 경우 역간 평균거리 1km내 외임을 감안할 때 공항철도는 모든 열차가 급행열차인 셈이다. 공항철도의 최대 운행 속도는 110 km/h로 역을 출발해 다음 역에 정차할 때까지의 표정속도가 70km로 수도권 전철에 비해 2배 이상 빠르다. 이로 인해 인천 서부권과서울 도심을 가장 빠르게 연결한다.
과거에는뚝섬과 마포에 포구가 있어 번창하였으나, 육상교통이 발달되면서 자취가 사라졌다. 또한 노량도(서울 시흥)·양화도(서울 인천)·한남도(서울 용인)·송파도(서울 광주)·광나루(서울 광주) 등의 나루터가 있었으나한강대교가 가설된 후부터 옛날의나루터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한강 개발 이후가 된 후 관광용으로, 또한 통근용으로 수상 교통의 부활이 이루어졌다.
한강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86년 10월 26일부터 관광용 한강유람선 운행을 시작했다.여의도와잠실 등 8개선착장에서 운행하고 있다.[59]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07년 10월 11일부터 한강수상택시 운행을 시작했다.여의도와잠실 등 한강변 18개승강장에서 운행하고 있으며, 교통수단 뿐만 아니라 관광용으로 이용되고 있었으나 운항정지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