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경의 사후에 다시 왕조는 쇠약해졌다.무정은 현인부열을 임용해 상 왕조의 중흥을 완수했다. 무정의 공적을 칭송해 무정은 고종(高宗)으로 칭해졌다.
상나라 고종 이후의 왕은 대체로 어리석은 폭군이었다. 상 왕조의 마지막 왕인주왕(紂王)은 즉위 후달기라는 미녀에게 빠지고 폭정을 실시했고,백읍고가 아버지희창을 위해 알현하고 원숭이를 바쳤는데 달기의 모함에 의해주왕(紂王)에게 살해 당하고부친은 사면을 위해주왕(紂王)에게 살해 당한 백읍고의 육병을 먹은 뒤 귀가하고 먹은 육병을 토했고 임종 전에 상 왕조를 멸망할 대책을 세운 후 그의 아들인희발(姬發)이 상나라의 여러 제후들을 모아서주왕을 주살하고 상 왕조는 멸망했다.
은대의 국가는 왕이 거주하는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그 주위에는 농업생활을 영위하는 여러 촌락이 전개되어 있었으며, 왕이나 귀족은 농민을 지배하여 곡물을 조세로 징수해서 일족(一族) 및 예속되어 있는 가내노예나 각종 기술자들을 부양했다. 농민은 하나의 대가족 집단이 하나의 마을을 구성하고 마을의 경작지에서 영농을 하고 있었다. 이 혈연 촌락은 족장의 통솔 밑에 어느 정도의 자위조직(自衛組織)도 가지고 공동작업에 종사하여, 자율적인 생활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지배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농민을 장악하기보다는 족장들을 장악하고, 족장들을 통해서 촌락을 지배했다.[1]
은나라 시대의 정치는 신권정치로서 제사·정벌·권농·목축 등 주요한 국사는 신의 뜻을 묻는점(占)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사회는 부권적(父權的) 씨족제로서 처음은 형제 상속이었으나 곧 부자상속으로 되었다. 귀족은 더없이 정교한 청동기·백도(白陶)·옥기(玉器)를 사용하고 있었다. 농민은 목제 농기구나 석제 농기구를 사용하여보리·수수·기장 등을 재배하고,양잠을 하였으며,말·양·돼지·소 등을 사육했다.[2]인신공양 풍습 또한 존재하였다.[3]
상나라 사람들은 제(帝)가 우주의 지배자이며 그 의지에 따라 모든 미래가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점을 쳐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신정 정치가 이루어졌다. 갑골문은 상제의 의향을 묻기 위한 행위의 기록을 의미하는 것으로 상제에 대한 제사와 조상 숭배가 합쳐져서 상나라는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제정일치 국가의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상나라 시기에 정교한 청동기가 발달되었는데 이러한 청동기는 바로 신정적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신정적 권위는 쇠퇴하고 세속적 권위를 강화해 간 왕권이 성장하였다.
상나라는 읍제(邑制)국가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읍이란 씨족 집단을 중심으로 성벽을 갖춘 국가를 의미한다. 읍은 대읍과 족읍, 소읍으로 나뉘는데, 대읍은 상나라 왕이, 족읍은 상나라 왕과 연합관계에 있던 씨족의 우두머리, 소읍은 씨족의 우두머리와 연합관계에 있던 동족집단의 우두머리가 각각 통치하였다. 이처럼 누층적으로 구성된 읍들 사이와 정치적 연합관계를 봉건(封建)관계라고 부른다.
19세기 말에는허난성(河南省)에서 은허, 즉 은나라 수도의 유적으로 알려진 곳에서갑골문자가 새겨진 귀갑(龜甲)과 우골(牛骨)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은왕조의 계도(系圖)는 한대(漢代)의사마천이 《사기》(史記) 속에 기술하였는데, 갑골문자 속에 나타난 여러 왕의 이름과 그 세계(世系)가 《사기》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은허에서 출토되는 갑골문에 의하여 은나라 왕의 존재가 인정되고, 특히 은허로 도읍을 옮긴 후,반경의 동생인 왕 무정(武丁) 이후의 은나라 후반기의 실재가 확인되었다. 은허로 수도를 옮긴 후의 은나라 후반기의 실제 연대는 기원전 14세기 말부터 기원전 11세기 중엽이다.[2]
1899년에 갑골문(甲骨文)이 발견됨으로써 그 실존이 알려졌는데, '갑골'이란 거북의 뱃가죽뼈, 짐승의 뼈 혹은 소의 어깨뼈를 말한다. 갑골문이란, 갑골의 안쪽 면에 불에 달군 나무를 눌러 급속히 팽창시키면 표면에 국부적인 균열이 생기는데, 그 균열의 상태를 보아 점을 치고 거기에 점친 날짜와 점쟁이의 이름, 점친 내용과 결과 등을 새겨 넣은 글을 말한다. 갑골문의 주요 내용은 주로 조상신이나 자연신에 대한 제사의 여부, 전쟁의 가부, 농사의 풍흉, 바람과 비의 유무, 수렵이나 재해의 유무 등 왕의 통치와 관련된 다양한 사안들이었다.
상인(商人)라는 말은 상나라 사람들이 나라가 멸망한 후에 생업을 위해 각지를 떠돌아 다니며 물건을 팔았던 것에서 유래한다.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구체적으로 몇 년인지를 추정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중국의하상주단대공정은 이 사건을 기원전 1046년의 일로 보고 있다.예전의 설로는죽서기년에 무왕에서유왕(서주의 마지막 왕)까지 257년이는 기술이 있어 유왕이 죽은 것이 기원전 771년의 일이므로 상나라가 멸망한 것은 기원전 1027년이 된다. 또한서에는 주는 867년 동안 계속되었다는 기술이 있어 이것으로부터 기원전 1123년의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상나라 멸망을 가장 오래전으로 보는 것은 기원전 1127년, 가장 나중으로 보는 것은 기원전 1018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