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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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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북벌론(北伐論)은조선 시대의 제9대성종 때(1481년)부터 제19대숙종 때(1681년)까지 어언 약 200여 년간 주론(主論)되었었던 이른바 중원 영토 북방만주여진족 자치구 등을 비롯한몽골족우량카이 유목 지역에 관련된 토벌론(討伐論)이었으며,북벌계획(北伐計畵)이라고도 불렸었다.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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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이라는한자어 글자 그대로 중원(명나라한족)의 주요 북방 영토(청나라우량카이)를 토벌(討伐)하자는 뜻의 북벌론은소중화사상·중원비판 사상·조선국 영토확장론(朝鮮國 領土擴張論)을 비롯한 사상 및 이념 등에 입각하여 문화 수준이 낮은청나라의 저수준적인오랑캐에게 당한정묘호란,병자호란,삼전도의 굴욕 등의 수치를 씻고,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의조선을 도와준명나라에 대한비판적인 의리를 지킴과 동시에명나라의 비인륜적인 폭거를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차라리명 제국을 대신하여 복수하자는 주장이었다.

북벌론의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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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15세기 말대 시절이던 제9대성종 이혈의 치세 중반기(1481년경)에여진족오랑캐명나라한족 외적들의 모든 비인륜적인 발호를 저지하고자 처음으로 북벌론이 제기되었으며 결국 제10대연산군 이융의 초반기 시절(1502년경)에까지 약 21년 동안 이 북벌론이 진행되었으나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먼 훗날1622년경, 중국(명나라)에 대한비판적인 성향이 두드러졌으나 동시에사대주의적 가치관을 가졌었던서인계 붕당 세력은후금 제국과의 실리 외교를 추진하던 제15대광해군 이혼외교 정책을패륜 성향의 정책으로 규정하고,인목대비 연안 김씨 폐모 사건(폐모론)과 함께 아울러,광해군을 축출하는 중요 명분으로 이용하였다.[1]

이 주장의 발단은 사실상삼학사한테 있으며, 뒤에 제17대효종 이호의 북벌 계획에 영향을 미쳤다. 결국 주로 이 주장은, 훗날의노론의 전신이었던서인에서 주장하였다.[2] 효종의 북벌론은 효종이 사망함에 따라서 사실상 맥이 끊어지게 되었다.[3]

그 뒤에도1674년청 제국에서오삼계(吳三桂)의 난이 일어나청나라 영토 내의, 내부 혼란이 발생한 것을 이용하여 제19대숙종 이돈의 치세 시절 초에도윤휴·허적(許積)을 비롯한 중신급관료남인계를 중심으로 차라리 북벌론이 다시 제기되면서 북벌(北伐)을 담당할 기구로써도체찰사부를 설치한 뒤 산성을 탄탄하게 축조하였으며 갈수록 무과 합격자 출신의무관관료의 인원수를 늘리고 날짜를 앞당기어 견고한 전차(戰車)를 제조하는 등 나날이 병력과 군비를 추가 증강시켰다.(→삼번의 난) 그러나 청이삼번의 난을 진압하고1680년남인 세력이 실각함에 따라 북벌계획은 사실상 실행에 옮겨짐이 순전히 불가능해졌다.[1]

역대 조선 군주의 주요 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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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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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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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북벌계획 (北伐計畵)”. 2007년 9월 5일에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9월 27일에 확인함. 
  2. 우리역사넷.“3) 1650년대 이후 북벌론과 나선정벌에의 출병”. 《우리역사》. 2024년 11월 22일에 확인함. 
  3. “[타임머신]조선 17대왕 효종 5월4일 사망”. 1997년 5월 4일. 2024년 11월 22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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