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브란덴부르크 대도시권은 약 620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라인-루르 지역 다음으로 독일에서 2번째로 큰 대도시권이다.[6]
베를린은 서부슈판다우구에 있는하펠강(엘베강의지류)으로 흐르는슈프레강 강둑에 걸쳐 있다. 베를린의 주요 지형적 특징으로는 서부, 남동부 자치구에 위치한슈프레강,하펠강과 다메강에 의해 형성된 많은 호수가 있으며, 그중 가장 큰 호수는 뮈겔제호이다. 베를린은유럽 대평원에 위치하여온화한 계절 기후의 영향을 받는다. 도시 면적의 3분의 1가량은 숲, 공원, 정원, 강, 운하와 호수로 구성되어 있다.[7]
베를린은 13세기에 처음 문서로 기록되었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두무역로가 교차하면서[8]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1417~1701),프로이센 왕국 (1701~1918),독일 제국 (1871~1918),바이마르 공화국 (1919~1933),나치 독일 (1933~1945)의 수도로 기능하였다. 베를린은계몽주의,신고전주의,자유주의 혁명의 과학적, 예술적, 철학적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그륀더차이트 시대의 산업화로 인한 경제 호황으로, 베를린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였다. 1920년대 격동의 베를린은 세계에서 인구가 많은 수로 3위였다.[9]
제2차 세계 대전과 승전국의 점령 이후, 황폐해진 베를린은 분열되었다.서베를린은베를린 장벽(1961년 8월부터 1989년 11월까지)과동독 영토로 둘러싸인서독의 사실상월경지가 되었다.[10]동베를린은 동독의 수도로 선포되었고,본은 서독의 수도가 되었다. 1990년독일의 재통일 이후, 베를린은 다시 독일 전체의 수도가 되었다.
베를린에는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베를린 공과대학교,베를린 자유대학교,베를린 예술대학교, ESMT Berlin,헤르티 스쿨, 바드 칼리지 베를린과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들이 있다.베를린 동물원은 유럽에서 가장 방문객이 많은 동물원이자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동물원 중 하나이다. 세계 최초의 대규모 영화 스튜디오 단지인바벨스베르크가 있는 베를린은 국제 영화 제작을 위한 장소로 점점 인기를 얻어가고 있다.[18] 또한, 베를린은 축제, 다양한 건축물, 야간 유흥, 현대 예술, 그리 매우 높은 삶의 질로 잘 알려져 있다.[19] 2000년대 이후 베를린은 세계적인기업가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20]
약 1,500년 전에는 현재의 베를린 지역에 다양한슬라브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독일인 정착자들이 1100년대에 이 지역을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베를린은 이때까지만 해도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고, 슈프레 강의 북동쪽 둑에서 자라나기 시작하였다. 같은 시기에 슈프레 강의 섬에서 쾰른 (Coelln)이라는 마을이 형성되었다. 두 마을은 통상의 중심지였다.1307년에는 베를린과 쾰른이 그들의 공동 방어를 위한 연합을 설립하였고, 공통의 시청사를 지었다. 15세기에 베를린은브란덴부르크주의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15세기 후반에는호엔촐레른 왕가가 베를린을 그들의 관저로 만들었다.30년 전쟁 중에는 큰 피해를 입었고, 인구가 6,000명으로 줄어들었다.
베를린은 호헨촐레른 왕가의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래 다시 번영하였다. 그는브란덴부르크주를1640년부터1688년까지 통치하였고, 산업을 촉진시키고 건설에 후원하였다. 그의 통치아래, 슈프레강과오데르강 사이에운하를 건설하였다.170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들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가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1710년에는 베를린, 쾰른과 3개의 이웃 집단들이 통합하여 하나의 베를린을 이루었다. 1700년대에 베를린은 작은 읍에서 번영하는 통상과 제조업의 중심지로 증대하였다. 예술과 과학이 번창하였고, 산업이 빠르게 퍼져나갔다.1806년부터1808년까지나폴레옹 1세에 의해 점령당하였고, 그가 떠나자 독일의 강국이 된 프로이센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그 후1871년독일 제국의 수도가 되고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독일의 수도였다. 도시의 인구는1871년에 826,000명에서1910년에 2,076,200명으로 늘어났다.
1918년제1차 세계 대전 말에 독일 제국이 무너졌고, 베를린은 새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에 파업, 폭동, 또한인플레이션으로 인하여 도시는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베를린은 계속 자라났고,1920년에는베를린 대확장으로 7개의 도시들, 59개의 마을, 27개의 소유지가 베를린에 합쳐졌다. 1930년대에는 전 세계로 번져간경제 대공황에 의하여 타격을 받아, 후에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나치 정권이 세워지는 원인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군이었던미국,영국,프랑스,소련 연합국 4개국이 독일을 점령한 것과 별개로 베를린도 4개로 나뉘었다. 독일이 분단되면서 베를린도동베를린과서베를린으로 분단되었다. 서베를린은서독과는 다른 서방 연합군의 점령지로 간주되었으나, 행정권은 서베를린에서 행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서독의 수도가 될 수 없었고 분단기 서독의 실질적인 수도는본이었다. 한편 동베를린도 소련군의 점령지로 간주되었으나, 사실상동독의 수도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냉전 시기 서베를린은 동독으로 둘러싸인 자유 진영의 섬으로 불리기도 했다.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려는 동베를린 시민들이 늘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서동독 정부는1961년에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경계에베를린 장벽을 세웠다. 이는냉전의 상징이 되었다.빌리 브란트는 바로 이 때 서베를린의 시장직을 역임했다.
이 냉전 시기의 영향으로 인해 서독의 항공 허브로 프랑크푸르트와 뮌헨 등이 번성하게 됐고, 베를린은 지금도 항공 교통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한 편이다.
자국의 독일인 이외에 인구의 15%는 외국인이다. 이들은 베를린에 근로자로 들어왔는데, 그중의 절반은튀르키예인들이다. 베를린은이스탄불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터키인들의 도시로 알려졌다. 또한그리스,이탈리아, 전유고슬라비아,폴란드,러시아인들과아시아,아프리카에서 온 이민들도 살고 있다. 2017년 기준 베를린 시민의 15%는개신교인루터교 신자이고, 9.2%는가톨릭, 8.0%는이슬람교, 0.8%는유대교, 1.7%는 기타 종교 신자이다. 무종교 비율은 64.9%이다.
뮌헨 전체 인구의 70%는 현재 종교가 없으며, 이 부류의 인구가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다른 독일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천주교 신자와 개신교 신자가 꾸준히, 감소세를 보였다. 2023년 12월 31일 기준, 도시 인구의 7.1%가 천주교 신자였고, 12.2%가 개신교, 0.5%가 유대교 신자였다. 그 외에도 소수의 성공회 교도와 외국인들을 주축으로 한 이슬람교도가 존재한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세계에서 유명한 오케스트라 단들 중의 하나로 베를린에는 3개의 오페라하우스와 150개가 넘는 극장과 무대로 유명한오페라의 중심지이며,베를린 국제 영화제로도 유명하다.
지하철 1호선(Linie 1-Das Musikal)은 독일의 뮤지컬이다. 폴커 루트비히(Volker Ludwig)의 작품이다. 1986년에 초연되었다. 1995년 5월 내한하여 관객과의 대화를 가진 폴커 루트비히가 '음악적 레뷰'라고 규정한 이 작품은 레뷰 연극과 카바레 스타일을 혼합한 형식이다.
세계 최초의 대규모 영화 스튜디오 단지인 바벨스베르크가 있는 베를린은 국제 영화 제작을 위한 장소로 점점 인기를 얻어가고 있다.
↑Senatsverwaltung für Umwelt, Verkehr und Klimaschutz Berlin, Referat Freiraumplanung und Stadtgrün.“Anteil öffentlicher Grünflächen in Berlin”(PDF). 2021년 2월 25일에원본 문서(PDF)에서 보존된 문서. 2020년 1월 10일에 확인함. CS1 관리 - 여러 이름 (링크)
↑Sifton, Sam (1969년 12월 31일).“Berlin, the big canvas”. 《The New York Times》. 2013년 4월 12일에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8월 18일에 확인함.
↑“Global Power City Index 2009”(PDF). 《Institute for Urban Strategies at the Mori Memorial Foundation》. 2009년 10월 22일. 2014년 6월 29일에원본 문서(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10월 29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