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이후 바오다이는 다시 베트남에서 패권의 발톱을 드러내던 프랑스의 지원으로 남베트남의베트남국의 국가 원수가 되었으며, 1949년 프랑스와 조약을 맺고 통치권을 인정받지만, 1955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총리응오딘지엠이 국민투표를 통해 군주제를 폐지하자 프랑스로 망명했다.[1] 본명은응우옌푹티엔(베트남어:Nguyễn Phúc Thiển, 阮福晪), 즉위 전 이름은응우옌푹빈투이(베트남어:Nguyễn Phúc Vĩnh Thụy, 阮福永瑞)이다. 말황제(Mạt Hoàng Đế, 末皇帝)라고도 불린다.
바오다이가 아버지 카이딘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은 것은 13세 때다. 그러나 1858년 이래 베트남을 거듭 침공해 보호국으로 삼은 프랑스가 1887년 라오스ㆍ크메르와 함께 베트남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으로 통합해버린 터라, 바오다이는 아버지가 그랬듯 이름뿐인 황제에 지나지 않았다.[1]
바오다이는1932년에 귀국하고, 그는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하여 내정 개혁 등에 노력했다.1934년에는, 기독교도로코친차이나 출신의 남프엉과 결혼했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 식민지를 셋으로 나누어 북부 하노이 중심의 통킹을 반보호령으로, 남부 사이공(지금의 호치민) 중심의 코친차이나를 직할령으로, 중부 후에를 중심으로 하는 안남을 보호령으로 삼고 있었다.[1] 프랑스는 안남의 후에를 수도로 삼은응우옌 왕조의 황권을 형식적으로는 인정했지만, 실제의 시정권은 파리에서 파견된 총독에게 있었다.[1]
1945년 3월 베트남을 침공해 프랑스 세력을 몰아낸 일본군은 바오다이로 하여금 베트남 독립을 선언하도록 하고 그의 제위를 확인해주었다.[1] 당시의일본 군인 중에는 일본에 망명 중인 기외후를 베트남 제국 황제로 세우려고 했지만, 남방군이나 제38군은 베트남의 새로운 정권에게 불간섭의 방침으로 군정의 실시나, 친일 정권 건설을 배제하는 걸로 결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오다이는 독립한 베트남의 최초의 원수의 지위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독자적인 군 통수권이 허락되지 않는 명분뿐인 황제였다.
베트남에서는1946년에프랑스와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사이에 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지만, 바오다이는1949년에베트남에 귀국하여, 프랑스의 지원에 의해 남베트남의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흡수하여 수립된 베트남국(베트남 공화국)의 국가원수(국가주석)가 되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강화 협정으로서1954년에제네바 협정이 성립하면서, 베트남국은 국제적인 승인을 얻었다. 바오다이는1954년에응오딘지엠(베트남어:Ngô Ðình Diệm)을 총리로 임명했지만, 향락을 추구하는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므로 민심이 이반하여 1954년 국민투표에서 총리 응오딘지엠에게 향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촌동생바오로크를 총리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만다.응오딘지엠은1955년에베트남 공화국의 정치체제에 대해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그 결과,응오딘지엠은 승리하여,베트남 공화국을 대통령제로 이행시켜, 국가주석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바오다이는 국가원수 직위로부터 퇴임하여 프랑스파리에 망명하여 베트남으로 귀국하지 않고칸 부근에서 여생을 보냈다.1997년7월 31일에 파리의 육군 병원에서 사망했다.
↑가나다라마[깨진 링크([https://web.archive.org/web/*/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life%2F200307%2Fh2003073016443825340.htm&ver=v002 과거 내용 찾기)] [오늘속으로<866>(7월31일)]바오다이] 한국일보 2003/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