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이탈리아어:Milano,롬바르디아어:Milan,라틴어:Mediolanum)는이탈리아의 북부에 있는 도시로,롬바르디아주의 주도이다. 밀라노는 이탈리아 북부의 최대 도시로,롬바르디아 평원에 위치하고 있으며,포강이 이 도시를 흐르고 있다. 인구는2024년 12월 현재 136만 명이며,광역 도시권 내에 610만 명이 거주, 면적이 1500km2에 해당된다. 시내 인구는 수도로마 다음으로 많으며, 광역 도시권 인구는 로마를 훨씬 초과하여 이탈리아 최대의 대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밀라노는 국제, 다국적 도시로도 불리는데, 인구의 13.9%가 외국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유럽의 주요 도시이기도 한데 주요 교통수단이 밀라노를 통과하며 많은 유적지들이 남아 있고, 밀라노는금융업이 발달하여 많은 기업들이 본사를 두었다는 점에서 유럽에서 손꼽히는 경제도시이기도 하다. 밀라노 광역권의 GDP는토리노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가장 크며 유럽 최상위권에 속한다. 관광업에서도 손꼽히는 도시로서 방문객 규모는 이탈리아 내에서로마 다음으로 많으며 유럽에서는 다섯번째, 세게에서는 16번째로 많다.[1][2]
밀라노의 역사는 기원전 590년경켈트족에 의해 '메델라논'이란 이름의 마을을 세운 것이 기원이다. 기원전 222년고대 로마가 이 일대를 정복하고 도시명을메디올라눔으로 바꾸었다.[3][4]고대 후기에 이르러서부터서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정치적 중심지로 처음 주목받았으며,[5] 12세기~16세기에는밀라노 공국의 수도로서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이자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로 거듭나는 동시에 이탈리아르네상스를 주도하는 문화도시로서의 지위도 누렸다. 근세 시대에는합스부르크가의 지배기를 거쳐이탈리아 통일의 시발점이 되는 도시였으며, 20세기부터는 이탈리아의 산업 금융 수도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비알레 블리니와비알레 사보티노는 도심의보코니 지구에 위치해 있으며, 레스토랑, 아페리티프, 도시 문화의 국제적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이 지역은SDA 보코니의 교수와 관리자, 유명한 크리에이티브,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다.보코니 대학교와 수많은 역사적 건축물 및 현대식 건물의 존재는 이 지역을 도시에서 가장 코스모폴리탄적이고 독점적인 지역 중 하나로 만든다.
기원전 400년에 켈트족과 인스부레스족들은 밀라노와 주변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기원전 222년에 로마는 밀라노를 점령하여 메디올라눔이라고 불렀다. 로마가 점령한 지 몇 세기 후,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기원후 293년서로마 제국의 수도로 선포하였다.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로마 제국으로 떠났으며 대신막시미아누스가 황제로 임명되어 서로마 제국을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막시미아누스는 여러 대형 건축물들을 지었는데, 그 중에 대형 서커스로 크기는 470 × 85m(1,540 × 279ft)에 달했으며 그 외에 여러 개의 거대한 기념비, 공중 목욕탕, 임페리얼 궁전과 같이 여러 가지 크고 복잡한 건물을 건축하였다. 이로써 밀라노는 서로마 제국의 군사, 행정, 교통, 상업의 중심지로 발달했다.
313년 2월에는밀라노 칙령이 발표되었는데,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기독교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그리해 이곳은 종교의 중심지 역할로도 한 몫 하였다. 402년 서로마 제국의 수도는 라벤나로 이전하게 된다. 50년 후(452년)에는훈 족이 도시를 장악했다. 539년,비잔티움 제국과동고트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밀라노는 함락을 당했고 그 와중에 도시의 시설들은 철저히 파괴된다. 569년 여름,랑고바르드족[6]이 이 지방을 점령해랑고바르드 왕국을 세운다. 774년 밀라노는샤를마뉴에 의하여 프랑크 왕국의 일부로 편입된다. 샤를마뉴는 밀라노의 중요성을 인정해 다른 식민지보다 자유도를 높이 부여했다. 이후 이 지역은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로 편입된다.
중세 시대 밀라노는 풍부한 평원을 기초로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프리드리히 1세는 이탈리아를 공격해 1162년 밀라노는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며 또다시 재앙을 겪었다. 이를 계기로 롬바르디아 지방의 도시들은 동맹의 필요를 느껴 1167년롬바르디아 동맹이 창립되고, 밀라노는 동맹의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과 롬바르디아 동맹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결국 1183년 프리드리히 1세는롬바르디아 동맹을 인정해줬다. 하지만 이 동맹은 공동의 적에 의해 만들어진 동맹으로 불과해 군대가 물러나자 도시들은 서로 반목하게 되었으며 당시 전쟁으로 인해 도시는 혼란 속으로 빠진다. 또한 그 전쟁 때문에 밀라노의 인구와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히고 이후 10년동안이나 전쟁이 지속됐다.
이후 1277년비스콘티 가문이 밀라노의 영주로 추대받으며 영주에 의한 도시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세력을 더욱 넓혀 인근의 많은 영역들을 통치하게 되었으며 1395년 비스콘티는 밀라노 공작위를 얻는다. 이후 비스콘티 가문은 14세기 초부터 15세기 중반까지 밀라노의 권력을 유지하였다.
1447년이 밀라노의 마지막 공작이었던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비스콘티 가문의 영주정은 끝이나고 프란체스코스포르차에게 권력이 넘어간다.
스페인군이 쌓은 밀라노의 성벽노란색으로 표시된나폴레옹기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 밀라노가 수도로 표시되어 있다.
밀라노 공국 최후의 통치자였던루도비코 스포르차는 여타 이탈리아 내 국가들과의 분쟁에 맞서프랑스 왕국의 국왕샤를 8세에 군사원조를 요청하였고 1494년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샤를 8세의 사촌루이 도를레앙은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다가 이탈리아 대부분 지역이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 놓인 것을 파악하고, 몇년 뒤1500년 할머니가 비스콘티가의 일원이란 사실을 이용해밀라노 공국을 빼앗는다. 당시 밀라노는스위스 용병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루이의 후계자프랑수아 1세가마리냥 전투에서 스위스군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프랑수아 1세에 예속되기에 이르렀다.1525년에는스페인 군주국의 황제카를 5세가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치면서 밀라노를 포함한 이탈리아 북부는합스부르크가 스페인의 영토가 되었다.[7]
1556년 카를 5세는 아들펠리페 2세와 동생페르디난트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밀라노 일대의 이탈리아 북부는 펠리페 2세에게 넘어가 스페인 군주국의 영토로 남되, 카를 5세가 통치하던신성로마제국은 페르디난트 1세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이 물려받게 되었다. 1629년~1631년에는밀라노 대역병이 발생하여 전체 도시 인구 13만 명 가운데 6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전례없던 재앙으로 도시의 황폐화를 초래하였는데, 이탈리아 작가알레산드로 만초니의 소설 《약혼자들》에서 당시의 풍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때의 역병은 만인들로부터 스페인의 가혹한 통치와 퇴폐의 결과로 여겨졌으며,흑사병으로 시작되어 수세기에 걸친대유행의 종지부를 찍는 사례로 여겨진다.[8]
1700년 스페인 국왕카를로스 2세의 사망으로 스페인 압스부르고가의 대가 끊겼다. 이에 영토계승을 놓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충돌하면서 1701년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1706년 프랑스군이라미유 전투와토리노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이탈리아 북부를 오스트리아에 넘기게 되었다. 1713년~1714년위트레흐트 조약과라슈타트 조약 체결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이탈리아 북부 영토의 주권이 공식적으로 인정됨에 따라롬바르디아 지방과 수도 밀라노는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1796년 프랑스의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면서 밀라노는치살피나 공화국의 수도로 선언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밀라노를이탈리아 왕국의 수도로 선포하고 성당에서 이탈리아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패배한 뒤 밀라노는 1815년빈 회의를 거쳐 오스트리아의 영토로 되돌아왔다.[9]
1848년 3월 18일 밀라노에서 오스트리아의 통치에 대항한 반란이 일어나 야전사령관라데츠키가 도시에서 일시 후퇴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를밀라노의 5일(이탈리아어:Le Cinque Giornate)이라 부른다. 당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에 접해 있던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반란군 보호를 위해 군사를 파견하였고,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과반수의 통과로 롬바르디아 지역의 자국 편입을 비준하였다. 그러나 몇달 후 오스트리아는 군사를 새로 파견하여 7월 24일쿠스토차 전투에서 피에몬테군을 격파하고 이탈리아 북부에 대한 주권을 재확인받았다.
10년 뒤 사르데냐 왕국의카보우르 백작,가리발디,마치니 등 이탈리아 민족주의의 지도자들이 통일이라는 목표에 있어 공감대를 형성하고 국왕을 압박, 신생프랑스 제2제국의 황제나폴레옹 3세와 동맹을 맺어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이탈리아 신생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다.1859년 프랑스-이탈리아 합동군은 오스트리아군을콰드릴라테로라 불리는 롬바르디아 일대 사변선으로 몰아넣고솔페리노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뒀다.[10] 이 전투로 밀라노와 롬바르디아 일대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편입되었고, 이후이탈리아 반도의 나머지 국가들을 모두 병합하여 1861년이탈리아 왕국의 건국을 선언하며통일을 완수하였다.
밀라노는 이탈리아 통일 이후 북부 지역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대폭 확대해 나갔다. 오스트리아의 후원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이탈리아 북부 철도망이 빠르게 완공되어 이 지역의 교통중심지로서 거듭났고, 나아가 1882년고트하르트 터널, 1906년심피온 터널의 개통으로 물류와 여객수송이 집중된 남유럽의 철도 허브로 성장했다. 이는 1919년 운행을 시작한오리엔트 급행열차의 중간기착지로 선정된 것으로도 확인된다.[11] 또한 풍부한 수력자원을 바탕으로 철강과 섬유산업을 발전시켰고, 밀라노에 소재한 은행들이 이탈리아 금융시장을 장악하면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금융도시가 되었다. 1898년 5월에는 치솟는 물가를 버티지 못해 벌어진 폭동을 진압하면서 많은 인명이 희생된바바 베카리스 학살이 벌어졌다.[12]
1910년대 밀라노에서 정치와 언론 경력을 쌓았던베니토 무솔리니는 1922년 10월 28일 밀라노 산 세폴크로 광장에서 파시스트계 군사집단인검은 셔츠단의 첫 집회를 열었다. 이후 무솔리니는로마 진군을 벌여 권력을 획득하고이탈리아 파시즘 시대를 열었다.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밀라노의 산업단지와 교통시설은연합군의 대대적인폭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일반 거주구역도 타격을 입었다.[13] 1943년이탈리아의 항복 이후 독일군은 이탈리아 북부 일대를 점령하고 약탈하였으며 이에 맞서 레지스탕스군이 대규모 게릴라전을 일으켰다.[14] 1945년 4월 29일 미국제1기갑사단이 밀라노로 진군하는 과정에서 이탈리아 저항군이 밀라노를 먼저 장악하고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정부 관계자, 군장교들을 처형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과거 레지스탕스군의 처형장소로 쓰였던로레토 광장에 그대로 목매달아 내걸어졌다.
전후 경제회복기에 접어들면서 도시 재건 노력과 더불어이탈리아의 경제 기적으로 불리는 고도성장을 타고이탈리아 남부에서 북부로의 인구이동이 활발해졌는데 밀라노도 그 중 하나였다. 밀라노의 인구는 1951년 130만명에서 1967년 170만명으로 증가했다.[15] 이 시기 밀라노는 빠르게 복구되는 것은 물론벨라스카 타워,피렐리 타워 등 근대적인 고층빌딩이 건설되며 새로운 번영의 도시로 나아갔다.[16] 하지만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납의 시대'라 불리는 혼란기에는 전례없던 거리폭력과 노동 파업, 정치테러가 빈번하였다. 그 절정은 1969년 폰타나 광장의 국립농업은행에서 벌어진폭탄 테러로서 17명 사망, 88명 부상이라는 상흔을 남겼다.
1980년대아르마니,프라다,베르사체 등 밀라노 명품 브랜드의 국제적 성공으로 밀라노는 세계 패션의 수도로 자리잡았다. 이 시기미국과일본을 중심으로 외국인 관광객이 크게 증가하였으며, 증권거래소의 시가총액은 5배 이상 상승하였다.[17] 이 시기 이탈리아 언론에서는 밀라노의 여유로운 삶을 두고 '취하는 밀라노' (Milano da bere)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18] 1990년대에는 이탈리아를 뒤흔든 부패 스캔들인탄젠토폴리 사건이 벌어진 도시로서 수많은 정치인과 사업가가 재판에 넘겨지는 오명을 썼다. 여기에 심각한 금융위기와 섬유, 자동차, 철강산업의 쇠퇴로 불경기의 영향을 받았다.[16] 이 시기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추진한 밀라노 2, 밀라노 3 프로젝트는 1980년대~1990년대 밀라노 주택단지 확보 정책으로서 경제사회적인 면에서 밀라노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사업으로 남았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밀라노는 옛 공업지대의 대대적인 재개발에 나섰다.[19] 밀라노의 새로운 비즈니스지구인포르타 누오바와시티라이프가 이 시기에 건설되었으며, 밀라노를 대표하는 박람회장인로 지구도 함께 조성되었다.[20] 또한 전통적인 제조업의 사양화와 함께 출판, 금융, 은행, 패션, 디자인, 정보기술, 관광업 등 새로운 산업이 대체 성장을 꾀하였으며,[21]2015년 세계 박람회와2026년 동계 올림픽 등의 국제 행사 유치에도 나서면서 국제적인 혁신도시로의 리브랜딩을 꾀하고 있다.
밀라노는포 계곡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포강, 북쪽으로는 큰 호수(코모 호수,마조레 호수,루가노 호수)가 있고, 서쪽으로티치노강, 동쪽으로아다강이 있는 알프스 기슭의 중간 지점에 있다. 도시의 땅은 평평하며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122m이다.
행정 구역코무네의 면적은 약 181k㎡이고, 인구는 2013년 기준으로 1,324,169명, 인구 밀도는 k㎡당 7,315명이다. 밀라노 광역권의 면적은 1,575k㎡이며, 2015년 인구는 3,196,825명으로 추산되었으며, 그 결과 밀도는 k㎡당 2,029명이었다.[22] 밀라노, 몬차와 브리안차,코모,레코 및바레세의 일부로 구성된 광역권 지역은 너비가 1,891k㎡이고, 인구는 5,270,000명이며 밀도는 k㎡당 2,783명이다.[23]
도심의 동심원 배치는 항해가 가능하고, 상호 연결된 고대 운하 시스템인나빌리를 반영한다.[24] 도시의 교외는 주로 북쪽으로 확장되어바레세,코모,레코 및베르가모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많은 공동체를 삼켰다.[25]
쾨펜 기후 구분에 따르면 밀라노는 중위도의 4계절온난 습윤 기후(Cfa)를 특징으로 한다. 밀라노의 기후는 덥고 습한 여름과 춥고 안개가 자욱한 겨울이 있는 북부 이탈리아 내륙 평야의 대부분과 유사하다.알프스와아펜니노산맥은 북유럽과 바다에서 오는 주요 순환로부터 도시를 보호하는 자연적인 장벽을 형성한다.[26]
겨울에는 일일 평균 기온이 영하(0 °C) 아래로 떨어질 수 있고, 눈이 쌓일 수 있다. 밀라노 지역의 역사적 평균은 1961년에서 1990년 사이의 기간 동안 25cm이다. 1985년 1월에 90cm를 기록했다.[27] 교외 지역에서는 평균이 36cm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도시는 연간 평균 7일의 눈을 내린다.[28]
도시는 종종 겨울 동안 짙은 구름이나 안개에 가려지지만, 남부 지역에서 논이 제거되고, 도시열섬 효과가 최근 수십 년 동안 이러한 발생을 줄였다. 때때로푄 바람으로 인해 온도가 예기치 않게 상승한다. 2012년 1월 22일에는 일일 최고 기온이 16 °C에 도달했고, 2012년 2월 22일에는 21 °C에 도달했다.[29] 대기오염 수준은 추운 공기가 토양에 달라붙는 겨울철에 크게 증가하여 밀라노를 유럽에서 가장 오염된 도시 중 하나로 만든다.[30]
밀라노의 여름은 덥고, 습도 수준이 높으며, 최고 온도는 35 °C 이상이다. 높은 습도, 도시 열섬 효과와 바람 부족으로 인해 여름철에는 야간에 종종 후덥지근하다.[31] 일반적으로 여름은 평균 일광이 13시간 이상인 맑은 하늘을 즐긴다.[32] 그러나 비가 내리면, 뇌우와 우박이 동반될 가능성이 더 크다.[32] 봄과 가을은 일반적으로 쾌적하며 온도 범위는 10~20 °C이다. 이 계절은 특히 4월과 5월에 더 높은 강우량이 특징이다.[33] 상대 습도는 일반적으로 일년 내내 45%(편안함)에서 95%(매우 습함) 사이이며, 드물게 27%(건조) 아래로 떨어지고, 100%까지 도달한다.[32] 바람은 일반적으로 고요한 편에 속하다. 연중 일반적인 풍속은 0에서 14km/h(고요한 바람에서 부드러운 산들바람)로 다양하며, 바람이 강하게 불 수 있는 여름 뇌우 동안을 제외하고, 29km/h(신선한 바람)를 거의 초과하지 않는다. 봄에는알프스에서 부는트라몬테인이나 북쪽에서보라와 같은 바람이 부는 강풍과 같은 폭풍이 발생할 수 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리적 위치로 인해 밀라노는 유럽에서 바람이 가장 덜 부는 도시 중 하나이다.[32]
공식 이탈리아 통계 기관인 ISTAT에 따르면 2018년 12월 31일 현재 밀라노시의 공식 추정 인구는 1,378,689명으로[38], 2011년 인구조사에서 136,556명 또는 약 11% 증가했다. 같은 날짜에 3,250,315명이 밀라노 지방급 지자체에 살았다.[39] 오늘날 밀라노의 인구는 역사적 정점보다 적다. 전후의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밀라노의 인구는 1973년에 1,743,427명으로 정점을 찍었다.[40] 그 후 수십 년 동안 인구의 약 3분의 1이 교외의 외곽 지대와 도시 주변으로 새로운 위성 정착지로 이주했다.
밀라노는 파리 다음으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극동 아시아인 공동체의 본거지이며 필리핀과 중국인이 외국인의 약 4분의 1을 차지한다. (2015년 기준 250,000명 중 약 70,000명)[41]
오늘날 밀라노의 교외는 도시 본연의 경계와 특별 지위를 가진 지방 당국의 경계를 훨씬 넘어 확장된다. 인접 도시 지역은 2015년에 5,270,000명의 거주지였으며[23], 광역권 지역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그리고 EU에서 네 번째로 큰 이 도시는 820만 명 이상의 인구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42]
2019년 기준으로 약 277,773명의 외국인 거주자가 밀라노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는 전체 거주 인구의 19.9%를 차지한다. 이 수치는 이민자 인구가 지난 15년 동안 두 배 이상 증가했음을 시사한다.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밀라노는 두 차례의 큰 이민 물결을 겪었다. 두 번째는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하여 외국 태생 이민자들이 우세한 것이 특징이다. 초기 시기는 소위 이탈리아의 전후 경제 기적과 일치하며, 급속한 산업 확장과 대규모 공공사업을 기반으로 한 비정상적 성장의 시대로, 주로 농촌과 저개발 남부 이탈리아에서 400,000명 이상의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었다. 지난 30년 동안 인구에서 외국 태생의 비율이 급증했다. 이민자들은 주로 아프리카(특히 에리트리아, 이집트, 모로코, 세네갈, 나이지리아)와 동유럽의 이전 사회주의 국가(특히 알바니아,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마케도니아, 몰도바, 러시아)에서 유입되었으며,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 아시아인(특히 중국인, 스리랑카인, 필리핀인)과 라틴 아메리카인(주로 남미인)이 대세를 이룬다. 1990년대 초 밀라노에는 이미 약 58,000명(당시 인구의 4%)의 외국 태생 거주자가 있었고, 2010년 말에는 117,000명 이상(전체의 약 9%)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수십 년 동안 계속된 많은 이민자들로 인해 이 도시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국제적이고, 다문화적인 도시가 되었다. 밀라노는 특히 2011년에 거의 21,000명의 인구를 가진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중국인 공동체를 유지한다. 9구에 위치한 중요한 상업 거리인 파올로 사르피 거리를 중심으로 하는 밀라노 차이나타운은 원래 1920년대에저장성원청현 출신의 이민자로 소규모 직물과 가죽 작업장을 운영했다. 밀라노에는 또한 상당한 영어 사용자 공동체(3,000명 이상의 미국, 영국과 호주 국외 거주자)가 있고, 여러 곳의 영어 학교와 헬로 밀라노(Hello Milano), 웨어 밀라노(Where Milano), 이지 밀라노(Easy Milano)와 같은 언어 출판물을 출간했다.
밀라노는로마 제국 말기부터 기독교인이 많은 도시였다. 그 종교사는성 암브로시우스의 특징으로 구분되었는데, 그의 유산에는 밀라노 대교구의 대부분에서 약 5백만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사용하는암브로시오 전례(Rito ambrosiano)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이 예식은 미사, 전례 연도(사순절은 로마 예식보다 4일 늦게 시작), 세례, 장례 예식, 사제 복장, 신성음악(그레고리우스 말고 암브로시오 성가를 예식에 사용) 등의 다양한 절차를 가진다.
또한 이 도시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정교회 공동체가 있는 곳이다. 롬바르디아에는 적어도 78개의 정교회 본당과 수도원이 있으며, 대부분이 밀라노 지역에 있다. 밀라노의 주요 루마니아 정교회는 가톨릭 승리의 성모 마리아 교회(Chiesa di Santa Maria della Vittoria)로, 현재 루마니아 지역 사회에 사용하도록 허가되었다. 유사하게, 러시아 정교회 추종자들의 기준점은 파스퀴롤로에 있는 산 비토 가톨릭 교회이다.
밀라노의 유대인 공동체는 이탈리아에서 로마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크며, 주로 세파르디를 비롯한 약 10,000명의 회원이 있다. 주요 도시 회당인 헤찰 다비드 u-모르데차이 사원은 건축가 루카 벨트라미가 1892년에 지었다.
밀라노는 또한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무슬림 공동체 중 하나를 가지고 있으며, 도시는 1300년에 루세라의 고대 모스크가 파괴된 이후로 돔과 첨탑이 있는 이탈리아 최초의 새로운 모스크를 건설했다. 2014년 북부동맹 등 우익 정당들이 강력히 반대하는 가운데 시의회는 정치적 논쟁이 첨예한 새 모스크 건립에 합의했다.
현재 밀라노 대도시 지역의힌두교와시크교도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제공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다양한 출처에 따르면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전체인도 인구의 약 40% 또는 약 50,000명이 롬바르디아에 거주하며, 많은 힌두교 사원과 시크교 사원이 존재하고 영국에 이어 유럽에서 가장 큰 공동체를 형성하는 곳이다.
20세기 초의 격동기를 지나며 밀라노에도 한발 앞서 나아가는 혁신적인 건축물이 들어섰다. 이탈리아의아르누보 양식이 밀라노에 구현된 사례로는 건축가주세페 솜마루가가 설계하여 1903년 완공된카스틸리오니궁이 대표적이며, 오텔 코르소,카사 구아초니의 조철과 계단도 이에 해당된다. 여기에 밀라노의 전통적인 아르누보 양식에 신로마네스크와고딕 복고건축을 접목시킨 마지막 사례로 평가받는 베리메레갈리 저택도 예시로 들 수 있다.[51]1910년대 신중세 양식으로 지어진 카스텔로 코바 (Castello Cova) 등의 사례는 과거의 건축 트렌드를 불러일으키면서도 새롭고 절충적인 형태의 건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52]아르데코 건축의 경우파시스트 건축과도 맞물린 사례로서 1931년 지어진밀라노 첸트랄레역이 대표 사례로 꼽힌다.[5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급격한 재건사업과 고도성장으로 밀라노의 인구도 두 배 이상 급증하였다. 이에1950년대와1960년대에는 신규 주택단지와 상권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여 도시개발도 급격히 이루어졌다. 이 시기 밀라노에서는 1958년벨라스카 타워, 1960년피렐리 타워, 밀라노 위성도시의 주택개발, 저가 공공주택 건설사업 등 밀라노 건축사의 중요한 사례들이 기록되었다. 또한 최근 수년 간탈산업화와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옛 산업단지의 대대적인도시재생사업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밀라노 도심의포르타누오바와 밀라노 교외의로 시에 위치한피에로밀라노 등 현대적인 주택지구와 금융지구 조성 사례가 꼽힌다. 여기에 밀라노의 옛 전시회장을 시티라이프 (Citylife)라는 이름으로 재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주거단지와 박물관, 도심 공원과 고층빌딩을 조성하였는데, 고층빌딩의 경우 설계자의 명칭을 따서이소자키 아라타 빌딩 (202m로 이탈리아 최고층 건축물),하디드 타워,리버스킨트 타워로 명명하였다. 오늘날 밀라노의 스카이라인은 밀라노 북동부의 포르타누오바 지구와 북서부의 시티라이프 지구에 들어선 고층건물이 지배하고 있다.
밀라노의몬테 스텔라는 '몬타녜타 디 산 시로' (Montagnetta di San Siro), 즉 산시로 지역의 작은 산으로도 불리며, 인공적으로 조성된 언덕이자 교외 도시공원으로 자리해 있다. 몬테 스텔라는제2차 세계 대전 시기 폭격으로 파괴된 건물 잔해와20세기 중반에 철거된 스페인 통치기의 밀라노 성벽 잔해를 쌓아 만들었다. 높이는 25m에 불과하지만 밀라노 전체가 평지인 관계로 도시와 주변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맑은 날에는알프스 산맥과아펜니노 산맥을 볼 수 있다. 몬테 스텔라의 대표적인 공원으로는 '정의의 정원' (Giardino dei Giusti)가 있는데 대량학살과 반인도적 범죄에 반대하였던 유명인사들을 기리는 정원이다. 이곳에는 각 인물마다 한 그루씩 기념수목이 헌정되어 있으며,모셰 베지스키,안드레이 사하로프,스베틀라나 브로즈,피에트로 쿠치우키안 등의 이름이 남겨져 있다.
밀라노 도심부브레라궁 뒷편에 위치한브레라 식물원도 밀라노의 대표적인 공원으로 꼽힌다. 이곳은 대부분 직사각형 벽돌 화단으로 조성되어 있는 가운데 18세기 타원형 연못과 19세기 첨탑과온실을 갖추고 있다. 브레라 식물원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은행나무와 여러 수목의 표본이 심어져 있다. 이밖에 밀라노는 이탈리아에서도 가장도시화가 크게 이루어진 지역임에도 불구하고그린벨트 지역을 갖추고 있으며 도심부에도 여러 정원들을 두고 있다. 밀라노 북부와 남부의 농장과 삼림지대는 각각 '파르코 노르드 밀라노' (1975년), '파르코 아그리콜로 수드 밀라노' (1990년)이란 이름의 지역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58][59] 밀라노 서쪽에는 파르코 델레 카베 (Parco delle Cave)라 하여자갈과모래 채취용으로 쓰이던 부지에 인공호수와 숲을 조성한 녹지대를 두고 있다.[60]
밀라노의 구상미술은중세 시대에 번성하였으며비스콘티 가문이 예술가들의 후원자로 나서면서고딕 미술과 고딕 건축을 꽃피운 도시로 탈바꿈해 나갔다. 일례로밀라노 대성당은 이 시기에 기획된 대표적인 고딕 건축 작품이라 할 수 있다.레오나르도 다 빈치 역시 1482년~1499년 밀라노에 머물면서 여러 작품들을 남겼는데, 성모 마리아 수태회의 의뢰로 그린〈암굴의 성모〉와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의 일면을 장식한 벽화 〈최후의 만찬〉이 대표작이다.[62]17세기~18세기로 넘어오면서 밀라노 역시바로크 미술이 전래되기 시작하였으며 영향력 있는 예술가와 건축가, 화가들이 거주하였는데카라바조와프란체스코 아예츠가 대표적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은 브레라 아카데미에 소장되어 있다.
밀라노는디자인,패션,건축의 글로벌 수도로 평가받고 있다.[70] 1930년대 건설된트리엔날레는 아르테궁에 위치한 디자인 박물관이자 행사장으로 이탈리아 디자인, 도시계획과 건축, 음악과 미디어 등 미술과 산업의 조화를 접목한 시도들을 조명하고 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들어서부터는 이탈리아의 대표 산업도시이자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도시로서 당대 디자인과 건축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이는 통계로도 확인되는데 1952년 밀라노의 패션산업 수출규모는 7억 2600만 달러였던 것에서 1955년 725억 달러로 폭등한 것이 대표적이다.[71] 오늘날 밀라노는 고품질의 가구 디자인과 인테리어 디자인 산업으로 여전히 이름나 있으며, 유럽에서 가장 큰 상설 무역박람회인 피에라밀라노, 전세계적으로 권위있는 국제 가구 디자인 페어인 '살로네 인테르나치오날레 델 모빌레'가 밀라노에서 개최되고 있다.[72]
밀라노는뉴욕,파리,런던과 함께 세계 패션 수도로 꼽힌다.[73] 밀라노는 이탈리아 내에서도프레타포르테 (고급기성복) 산업의 대명사로 꼽히고 있으며,[74]발렌티노,베르사체,프라다,아르마니,돌체앤가바나 등이탈리아 패션업계의 대다수 브랜드가 밀라노에 본사를 두고 있고 전세계 패션 브랜드도 밀라노에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나아가 밀라노는 국제 패션계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로 꼽히는밀라노 패션 위크를 1년에 두 차례씩 개최하고 있다.[75] 밀라노를 대표하는 고급 패션 구역으로콰드릴라테로 델라 모다 (quadrilatero della moda)가 있는데, 이는 밀라노에서도 명성 높은 패선거리인 몬테 나폴레오네가,스피가가,산탄드레아가,만초니가,베네치아로 등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쇼핑몰로 꼽히는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를 아우르는 용어이기도 하다.[76] 한편 밀라노의 세련된 노년 여성의 옷차림과 일상을 표현하는 단어로 '스키우라' (sciura)가 있다.
이탈리아 여느 도시가 그렇듯 밀라노도 고유의 음식문화를 발전시켜 왔는데, 북이탈리아 요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와 같이파스타 대신쌀을, 식물성 기름 대신버터를 더 사용하며,토마토나생선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밀라노의 전통 요리로는 송아지고기로 만든커틀릿 요리인코톨레타 알라 밀라네세 (Cotoletta alla milanese),돼지갈비찜과 소시지에사보이양배추를 곁들인카설라 (cassoeula), 송아지정강이찜에그레몰라타 소스를 뿌려 먹는오소부코 (ossobuco),사프론을 쓰는리소토 알라 밀라네세 (risotto alla milanese),곱창에 콩을 곁들인 부세카 (busecca), 버터에 남은고기로 만든미트볼 요리인몬데길리 (mondeghili),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와인, 감자와 함께 찐 브라사토 (brasato) 등이 있다.
특정 기간에 먹는 빵 요리로는 우선카니발 기간에 먹는 납작 튀김과자 키아키에레 (chiacchiere), 동그란 쿠키인 토르텔리 (tortelli),부활절에 먹는 비둘기 모양의 케이크 콜롬바 (colomba),위령의 날에 먹는시나몬 쿠키인 파네 데이 모르티 (pane dei morti, 죽은 자의 빵),크리스마스에 먹는파네토네가 있다. 이밖에 밀라노의살라미는 고운 곡물이 들어간 살라미로 이탈리아 전역에 판매되고 있으며, 밀라노의 대표치즈로는고르곤졸라,마스카르포네,탈레조, 콰티로 등이 있다.
밀라노 도심에서 남동부 방면으로 약 40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산콜롬바노알람브로는 1km² 면적의 포도밭을 두고 레드와인을 생산하는 마을로서 이탈리아의 원산지 표시제도인DOC의 인증을 받은 마을이다. 산콜롬바노 DOC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최소 알코올도수가 11%여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78]
밀라노는 세계적인레스토랑과카페를 둔 도시로도 잘 알려져 있다.[79] 2014년 기준 밀라노에서미쉐린 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은 총 157곳에 달하며 그 가운데 3곳인크라코, 사들레르, 일루오고 디 아이모 에 나디아는 2스타에 해당된다.[80][81] 밀라노 도심부의 브레라지구와 나빌리지구에는 유서깊은 레스토랑과 바가 밀집해 있는데, 그 중에서도안티카 트라토리아 바구토는 1284년에 개업하여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이자 유럽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식당으로 꼽힌다.[77] 밀라노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인카페 코바도 1817년에 개업하여 2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카페로 유명하다.[82] 이들을 비롯해 최소 70년 이상 영업하여 이탈리아 사적지로 등재된 곳은 총 15곳에 달한다.[83]
밀라노 교통공사 (ATM, Azienda Trasporti Milanesi)은 밀라노 시립 운송 회사이다. 5개의지하철 노선, 18개의트램 노선, 131개의 버스 노선, 4개의 무궤도 전차 노선, 1개의 인력 이동 노선을 운영하며, 2018년에는 약 7억 7,600만 명의 승객을 수송했다.[86] 전체 교통망의 규모는 1,500여 km에 달하며 46개 지자체에 도달한다.[87] ATM은 대중교통 외에 자전거 공유와카셰어링 시스템을 포함한 교환 주차장과 기타 운송 서비스를 관리한다.[88]
밀라노 지하철은 도시와 주변 지자체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빠른 대중교통 시스템이다. 지하철의 규모는 총 연장 101km, 113개 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부분이 지하에 있다.[89] 일일 이용 승객 수는 115만 명으로[90], 이탈리아에서 가장 크고, 유럽에서 가장 크다.
트레노르드가 운영하는밀라노 교외 철도 서비스는 대도시 지역과 도심을 연결하는 12개의 S 노선으로 구성되며 모든 지하철 노선으로 환승이 가능하다. 대부분의 S 노선은 일반적으로밀라노 파산테선이라 불리는 밀라노 시내의 직통 노선을 통과하며 중앙 지하 구역에서 4~8분 간격으로 2층 열차가 운행된다.[91]
연간 1억 2천만 명의 승객이 이용하는밀라노 중앙역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8번째로 붐비는 기차역이며, 이탈리아에서는로마에 이어 두 번째로 붐비는 기차역이다.밀라노 카도르나역과밀라노 포르타 가리발디역은 각각 이탈리아에서 7번째와 11번째로 붐비는 역이다. 2009년 말부터 두 개의 고속열차 노선이 밀라노와로마,나폴리,토리노를 연결한다. 이탈리아의 다른 주요 도시와의 이동 시간이 상당히 단축된다.제노바와베로나를 향하는 추가 고속 노선이 건설 중이다. 밀라노는니스,마르세유,리옹,파리,루가노,제네바,베른,바젤,취리히 및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국제 직행열차와 파리와디종(Thello),뮌헨 및비엔나(ÖBB)로 가는 야간 침대 서비스가 제공된다.[92]
밀라노는롬바르디아 지역 기차 네트워크의 핵심이기도 하다. 지역 열차는레노르드(밀라노 카도르나에서 출발)와트레니탈리아(밀라노 첸트랄레 및밀라노 포르타 가리발디에서 출발)에 의해 두 가지 다른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2011년부터 새로운 회사인 트레노르드는 롬바르디아에서 트레니탈리아와 레노르드 지역 열차를 모두 운영하여 매일 50개 이상의 노선에서 750,000명 이상의 승객을 태우고 있다.[93][94]
도시 트램 네트워크는 약 160km의 트랙과 18개 노선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럽에서 가장 진보된경전철 시스템이다.[95] 버스 노선은 1,070km 이상을 운행한다. 밀라노에는 민간 회사가 운영하고, 밀라노 시의회에서 허가한 택시 서비스도 있다. 이 도시는 또한 북부 이탈리아의 모든 주요 고속도로가 연결되는 국도 네트워크의 핵심 노드이다. 수많은 장거리 버스 노선이 밀라노와 롬바르디아 및 이탈리아 전역의 다른 많은 도시와 마을을 연결한다.[96]
밀라노 대도시 지역에는 3개의 국제 공항이 있으며, 2018년에는 총 약 4,700만 명의 승객이 이용했다.[97]
말펜사 공항은 2018년에 2,470만 명의 승객이 이용했던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분주한 공항이며, 화물과 화물운송 부문에서 이탈리아에서 가장 분주한 공항으로, 2018년에 약 600,000톤의 국제 화물을 처리했다. 말펜사는 밀라노 시내에서 45km 떨어져 있으며, 말펜사 익스프레스 철도 서비스로 도시와 연결되어 있다.[98]
리나테 공항은 밀라노의 도시 공항으로, 현재 국내선과 단거리 국제선에 주로 사용되며 2018년에는 920만 명의 승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했다. 리나테 공항은 이탈리아 국적 항공사인알리탈리아의 두 번째로 큰 거점이다.[99]
오리오 알 세리오 공항(Orio al Serio Airport)은 베르가모 타운 근처에서 약 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주로 밀라노의 저가 교통을 제공하며라이언에어(2018년 1,290만 승객)의 주요 기지이다.[100]
자전거는 밀라노에서 점점 더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 2008년부터 교통체증과 대기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도시 전역에 자전거 도로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2019년COVID 전염병 동안 지하철 점거에 대한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35km의 자전거 도로가 단기간에 실현되었다.[102] 자전거 공유 시스템 BikeMi는 거의 모든 도시에 배포되었으며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스테이션이 없는 상업용 자전거와스쿠터 공유 시스템은 널리 사용 가능하다.
↑Morgan, Philip (2008). 《The fall of Mussolini: Italy, the Italians, and the Second World War》 Reprint.판.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67쪽.ISBN978-0-19-9219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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