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만력제 주익균(神宗 萬曆帝 朱翊鈞)의 치세는, 역대명나라 황제들의 통치 기간 중 가장 길며, 동시에 명나라가 건국된 지 200년쯤 지나고 나서, 그의 치세 초기에 만력중흥(萬曆中興)이라는 국가의 번화를 꽃피웠으나, 아울러 치세 말년기에는 오히려 명나라 황조가 갈수록 중과부적인 쇠락의 나락으로 서서히 몰락해 가는 시기에 속하기도 하였다. 묘호는신종(神宗)이고, 정식 시호는범천합도철숙돈간광문장무안인지효현황제(範天合道哲肅敦簡光文章武安仁止孝顯皇帝)로,1572년7월 5일부터1620년8월 18일까지 재위하는 동안1572년7월 5일부터1582년7월 9일까지 중신 재상이었던장거정(張居正)이섭정하였고1582년7월 9일부터1620년8월 18일 붕어할 때까지 친정하였다.
유왕주재후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큰형과 둘째 형이 병으로 모두 죽자 유왕세자(裕王世子)에 봉해졌다.1567년 아버지가 황위에 오르자 황태자에 책봉되었고1572년에는 10살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 만력제는 정치를 잘 알지 못했던 등극 초기에는 모든 일을 재상장거정에게 맡겼다. 오랫동안 그의 스승이었던 인연 때문이었다. 장거정의 교육 방식은 너무 엄격해 어린 만력제의 숨통을 조이기 일쑤였다. 공론을 줄이고 명실상부, 기강 확립, 명령 복종, 군비 확충 등을 중시한 그는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심 없이,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국사를 처리했으며 개혁에도 열심이었다. 덕분에 명나라는 그런대로 모양새를 갖출 수 있었다.
만력제가 제위에 오른 지 10년째 되던 해 장거정이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기를 펴지 못했던 반대파들은 입을 모아 장거정의 비리를 들추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장거정을 편들었던 만력제도 그의 재산이 자신을 능가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장거정의 가산을 몰수했다. 이후 그는 30년 간 여러 가지 구실을 대며 정사를 돌보지 않아 나라가 깊은 수렁에 빠져갔고, 나라에 아무리 위급한 일이 생겨도 동전 한 닢 내놓지 않는 지독한 구두쇠가 되어 갔다. 반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했다. 황제 개인의 재산은 날이 갈수록 늘어 갔으나 국고는 점점 줄어들었다. 황제가 돈을 밝히니 고관과환관들은 매관매직을 일삼는 탐관오리가 되어갔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만력제는 아부하는 자를 재상에 앉혀 놓고 오로지 치부에만 열성을 보였다. 거기다 술과 여자까지 밝혔다.
만력제가 죽은 뒤로 3명의 황제가 대를 이었으나 이미 만력제 때 뒤숭숭해진 민심은이자성의 난을 불러왔고, 그가 죽은 지 24년째 되던 해 명나라는 멸망을 맞이하고 말았다.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명나라가 망한 것은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 때였다”고 썼다.
당대와 후대를 통틀어 명나라 멸망의 원흉으로 지목된 만큼, 평판이 매우 좋지 못한 군주이지만,임진왜란 문제에 있어서만은 매우 적극적으로 정책을 펼쳐, 조선에 군사를 파견하고, 조선을 재정적으로 도와 고려황제로 별칭되기도 한다. 그런 영향으로 조선에서는송시열이 제자인권상하에게 만력제와숭정제의 제사를 지낼 사당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충북 화양계곡의만동묘(萬東廟)이다. 만동묘는 공자의 만절필동에서 유래된 말로 황하가 만 번 굽이쳐도 동해로 흐른다는 뜻이다. 대명천지, 숭정천하 등 명나라가 망했어도 조선이 명나라의 원군으로 나라를 건졌다는 글귀가 암벽에 새겨져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다.
만동묘는도산서원과 함께 조선의 4대 서원으로 명성을 떨쳤으나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헐려버리고 지금은 묘정비만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