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비아라는이름은나미브 사막에서 유래했으며, 이사막은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막으로 간주된다.[7]1990년독립 전에독일령 남서아프리카 (Deutsch-Südwestafrika)로서 처음 알려졌으며, 그 후남서아프리카로서 변경되었고,독일과영국의 식민지배에 영향을 받았다. 나미비아의 건조한 땅은 초기에부시먼족,다마라족,나마족이거주했으며 대략 14세기부터 반투족 확장과 함께이주해 온반투족이 정착을 했다. 당시 지역에 상륙하여탐험을 한 최초의유럽인은1485년에디오고 캉(Diogo Cão),1486년에바르톨로메우 디아스 등의 포르투갈 항해가였으며, 아직 그 지역은 포르투갈령 영토로 점유되지 않은 상태였다.1884년 나미비아는영국의 잠식에 앞서독일의 식민지가 되었으며영국의 지배하에 있던월비스베이를 빼고독일령 남서아프리카로 알려졌다.[8] 1904년부터 1907년까지헤레로인과나마쿠아인은독일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고 그 후헤레로나마쿠아 학살 속에, 10,000 명의 나마인 (부족의 절반 인구)과 대략 65,000 명의 헤레로인 (대략 부족의 80% 인구)이 죽었다.[9][10] 구금으로부터 풀려났던 생존자들은 수많은 방식의 아파르트헤이트 시스템 속에서 강탈, 추방, 강제노동, 인종 격리와 차별 정책을 당하였다. 실제로, 몇몇 역사가들은 나미비아에 자행한 독일의 학살이홀로코스트에서나치 독일이 사용한 모델이었다고 추론했지만,[11] 대부분의 학자들은 당시에 작은 아이에 불과했던 나치당에게 그 사건은 특별히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말한다.[12] 당시 학살의 기억은 독립한 나미비아에서 민족 정체성과독일과의 관계에 상응한 채로 남아있는 상태이다.[13]1883년부터1915년까지독일 제국의식민지였으며,1990년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부터독립했다. 독립 당시유엔 국가들의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지금도빈트후크 사람들은 높은 생활 수준을 자랑한다. 현재 야당인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 South West Africa People's Organisation)는마르크스주의 정당이었으나 현재는다당제민주주의와혼합 경제를 따르고 있다.
전체 면적은 825,418km2정도로서전 세계에서 34번째로베네수엘라 다음으로 큰나라다.몽골에 이어 나미비아는 인구 밀도가 가장 적은 나라 중의 하나이다.(1km2 당 2.5명) 나미비아는생명체와 관계가 없는 지대가 상당히 많다. 중앙고원,나미브 사막, 절벽 지대, 저지대(Bushveld),칼라하리 사막으로 크게 나눠볼 수 있다. 중앙 고원은 남북에 뻗쳐 있으며북동쪽으로 해골해안(Skeleton Coast)에 접한다.나미브 사막과 해안 평원이남서쪽에 있으며남쪽에는오렌지강이 있다.나미브 사막이 넓게 퍼져 있으며 모래언덕과평원을 따라서 전체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다. 폭은 100~수천km정도이다. 대절벽이 2,000m의 고도로 솟아 있는데 평균 온도는 인근 지역에서도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차이가 심해져서 상당히 춥기도 하다. 관목류의식물을 찾아볼 수 있다. 저지대가북동쪽에 있는데앙골라와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타 지역에 비해서 절대적으로강수량이 풍부한 곳이기도 하다.온도는 더 서늘하고 온화하여서 보통 기온이 10 °C 내지 30 °C에 머문다.토양이 모래질이며 대개 평평하다.모래로 구성되어 있어물을 함유할 수는 없다. 1년 내내 대부분 건조한 곳이지만우기가 되면 6,000km2 정도의호수가 생겨서 식수 해결에 큰 도움이 되며 동물들의 안식처가 된다. 또한 거대한 염전이 해역에 크게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1년당구매력평가환산은 5,870달러로, 소득 수준이 높지는 않으며,다이아몬드와우라늄과 같은 천연자원의 수출을 기반으로광업,농업,관광업이 주된 수입원이다. 나미비아의 빈곤 요인은독일의 식민지배,남아공 정부 시기 구조적인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주된 원인이다. 나미비아로 유입된 백인들은 나미비아 남부의 비옥한 토지를 독차지함에 따라 토지 분배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못했고, 이후 남아프리카 정부의반투 홈랜드 정책으로 국토의 25%에 90% 이상의 유색 인종이 강제 거주하게 되었다. 남부와 북부지역의 빈곤층과 경제 격차는 이러한 정책에서 기인한다. 대다수의 시민이 경제 성장의 혜택을 받지 못했으며, 부는 소수에 집중되었다. 광물자원 수출의 활황으로 경제는 성장하였으나, 국가의 소득 재분배 시스템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나미비아의 사회보장제도는 초기적 단계이고 불충분한 부분이 있으나, 세금으로 사회보장 비용을 충당하는 비납입형 연금제도로 사회 수당 제도가 정비되었다. 실업률이 높고 비정규직 노동자와 빈곤율이 높은 편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회 수당에 유사한 형태로서조건부현금급부 정책(Conditional Cash Transfer)을 적용하고 있다. 수급 가정은 납입금을 지불해야 할 필요가 없는 소득 지원을 통해 빈곤상황을 개선하고 인적자본형성을 지원 조건으로 빈곤의 세습을 중단할 목적으로 시행한다. 1980년대 남아공 정부 당시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과 구조조정 정책으로 실질임금의 저하와 실업률의 증가로 인해 생활수준이 악화되면서 이러한 제도들이 도입되었다.
일정소득을 보장하는기본소득제도를 나미비아의 오치베로 마을에서 실시했다. 기본소득연합에서는 오치베로 주민 930명 모두가 나이나 직업에 상관없이 매달 100나미비아 달러, 8달러 정도를 받게 했다.[14]
2004년 당시독일 내각 각료 중 유일하게 나미비아 수도빈트후크를 방문한독일 경제협력개발부 장관하이드마리 비초레크-초일(Heidemarie Wieczorek-Zeul)은전쟁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 용서를 구했으나, 독일 정부는 이것이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라고 선을 그은 바 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언론은 나미비아에 대한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1]보관됨 2014-07-07 -웨이백 머신, HIV InSite Knowledge Base, Comprehensive, up-to-date information on HIV/AIDS treatment, prevention, and policy from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Drechsler, Horst (1980).Let us die fighting, originally published (1966) under the title "Südwestafrika unter deutsche Kolonialherrschaft". Berlin: Akademie-Verlag.
↑Mohamed Adhikari, "'Streams Of Blood And Streams Of Money': New Perspectives on the Annihilation of the Herero and Nama Peoples Of Namibia, 1904-1908,"Kronos: Journal Of Cape History 2008 34: 303-320
↑Benjamin Madley, "From Africa to Auschwitz: How German South West Africa Incubated Ideas and Methods Adopted and Developed by the Nazis in Eastern Europe,"European History Quarterly 2005 35(3): 429-464 says it influenced Nazis.
↑Robert Gerwarth, et al. "L'Antichambre de l'Holocauste? A propos du Debat sur les Violences Coloniales et la Guerre d'Extermination Nazie" ("The Antechamber of the Holocaust? The Debate on Colonial Violence and the Nazi War of Extermination")Vingtième Siècle 2008 (99): 143-159 says most scholars think it did not influence the Nazis.
↑Reinhart Kössler, and Henning Melber, "Völkermord und Gedenken: Der Genozid an den Herero und Nama in Deutsch-Südwestafrika 1904-1908," ("Genocide and memory: the genocide of the Herero and Nama in German South-West Africa, 1904-08")Jahrbuch zur Geschichte und Wirkung des Holocaust 2004: 37-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