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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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35년 2월 10일(1935-02-10) 일제 강점기경상북도금릉군농소면 월곡리 |
| 사망 | 2024년 9월 15일(2024-09-15)(89세) 대한민국경기도부천시 |
| 성별 | 남성 |
| 국적 | 대한민국 |
| 본관 | 김해(金海) |
| 학력 | 국제대학교 법률학과학사 |
| 경력 | |
| 군복무 | 1958년공군중사 전역 |
| 정당 | 무소속 |
김동완(金東完,1935년2월 10일~2024년9월 15일)은 대한민국의기상청 통보관이었다.
경상북도금릉군농소면 월곡리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경상남도김해군 김해읍회현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농소국민학교와김천농림중학교를 거쳐 1953년대구공업고등학교 기계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국제대학 법률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아호(雅號)는 노루(老淚)이다.
원래 공군 조종사가 되고 싶어 대구공고 3학년 때공군사관학교 입학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최종 선발과정에서 탈락하였다. 그래서 공군하사관학교를 나와 조교를 지낸 후 5년간의 공군 복무를 마쳤다. 조종사의 꿈이 무너지자 수학 교사가 되려고 마음을 먹었었다.
1958년에 군복무를 마치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는 관상대 시험에 응시해 1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1959년 1월중앙관상대의 직원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기상 기술원 양성소에서 교육을 받고 1959년12월 24일김포국제공항 측후소의 기상요원으로 발령받게 되었다. 당시 그의 직책은 5급공무원(현재의 9급 수준)으로 기상 상황을 관측하고 기상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부산의 수영비행장(김해국제공항의 전신)측후소에서 4년 정도 근무하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관상대 예보관으로 활동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방송국들은 날씨보도의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중앙 관상대 직원이 나와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즉, 이 일을 공무원인 관상대 예보과 직원이 직접 하게 된 것이다. 하루는 선배 방송요원이 그만두어 누가 그 뒤를 잇느냐는 논의가 있었다.
김동완은 3일에 한번씩 교대로 돌아가며 하는 방송요원으로 뽑혔으며,KBS 라디오의 어업기상통보(후에 기상통보로 변경)의 기상 통보관으로 방송 활동을 시작했다. 통보관이라는 명칭이 생긴 것도 바로 이 무렵이라고 한다.
그는 통보관으로 활동하면서 교대 근무를 이용해성북구 삼양동에 연탄가게를 내었고, 때로는 가파른 계단과 언덕을 오르내리며 연탄 배달도 하였다. 1968년 여름부터는돈암동에 있던 한 택시회사에 취직해 1년 정도를 관상대와 택시 운전을 격일로 번갈아가며 근무하였다.
1972년4월 그는 《MBC 모닝쇼》에서 일기예보를 담당하며 방송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해 가을에는 《KBS 뉴스 9》의 일기예보를 맡아 방송 영역을 확장하였다. 그러나1973년유류 파동으로 인해아침방송이 중단되면서 《MBC 모닝쇼》가 폐지되었고, 《KBS 9시 뉴스》의 일기예보 역시한국방송공사 아나운서가 대신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한동안 중앙 관상대 예보과에서만 근무하게 되었다.
1974년 하반기 무렵, 그는동양방송(TBC)으로 자리를 옮겨언론통폐합이 이루어질 때까지 약 7년간 활발히 활동하였다.언론통폐합 이후인1981년 초,문화방송(MBC)으로부터 섭외 제안을 받았으나, 이는 관상대 기상 통보관직을 사직해야 하는 조건이었기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당시서울 근무가 길어지면서 순환근무를 하는 동료들에게 미안함을 느낀 그는 결국 관상대를 떠나 MBC 기상보도위원으로 새롭게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1992년3월프리랜서를 선언하였으며,1996년9월 23일까지MBC에서 활동하였다.
한편 그는1980년부터 결혼식 주례 활동도 병행하였다.1991년11월까지 약 150회의 주례를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전두환 전 대통령과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전씨와 어느 정도 인연도 있다. 그는 이것에 대해 "(전씨가) 백담사에 머물 때 처음 만나 '선배님(24회) 26회 김동완입니다'라고 했더니 어깨를 툭 치며 '(청와대) 재임기간에 한번 오지 그랬느냐'고 하며 무척 반가워했다. 하지만 곧 '그랬으면 지금쯤 청문회에 불려다니겠지'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서울 연희동의 전씨 자택에서 고교 선후배간으로 몇차례 만났다고 덧붙였다.
《MBC 뉴스데스크》의 일기예보 자리를 떠난 이후, 그는1997년에 민간 기상정보 회사인케이웨더의 이사로 자리를 옮겨2000년까지 재직하였다. 같은 해 그는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선거 기간 중 당뇨를 앓던 아내의 치료 시기를 놓치게 되었고, 이후에는 아내의 병간호에 전념하며 지냈다.
2024년9월 15일, 그는 향년 89세로 별세하였다. 유해는 화성 함백산추모공원에서 화장된 뒤, 김포 문수산 수목장에 안장되었다.
자녀: 1남 3녀
| 실시년도 | 선거 | 대수 | 직책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
| 2000년 | 총선 | 16대 | 국회의원 | 경북김천시 | 자유민주연합 | 6,925표 |
| 3위 | 낙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