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 내전(중국어정체자:國共內戰,간체자:国共内战,병음:Guógòng Nèizhàn궈궁 네이잔[*],영어:Chinese Civil War)은1927년 이후중국공산당이 당시 중국의 중앙 정부였던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상대로 벌인 내란 혹은중국국민당과중국공산당 사이에 중국 대륙의 패권을 두고 일어난 두 차례의내전을 말한다.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전쟁(戰爭)이라고도 부른다.
1911년청조가 무너진 이후, 중국은위안스카이로 대표되는군벌의 시대로 본격 돌입하게 된다.쑨원은 군벌이 지배하는 중국 각 지역에서 군벌지배를 종식시키고중화민국의 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해 서구민주주의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서방 국가들은 이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쑨원은볼셰비키 혁명으로공산주의 국가를 수립한소련에 눈을 돌려1921년 도움을 요청하였다.레닌은 이에 응하여1923년 대표단을상하이에 파견하였고, 쑨원과 레닌이 교류하면서중국국민당과중국공산당은 군벌 세력으로 분열된 중국을 재통일하고 외세로부터 독립을 쟁취한다는 목표 아래제1차 국공 합작을 이루게 되었다.
쑨원은 군벌과 대항하기 위한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장제스를 비롯한 장교들을 소련으로 파견하여 군사 기술을 습득하도록 하는 한편,광저우 교외에황푸군관학교를 세워 자체적으로 현대적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는공산주의자도 국민당에 입당하는 것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국민당 내에 공산당의 영향력이 상당하였다. 이 즈음저우언라이는황푸군관학교의 정치부 교관이었고,마오쩌둥도 국민당의 요직을 맡고 있었다. 요컨대, 공산당은 국민당 내에서 "정당 안의 또 다른 정당"으로 활동하고 세력을 키워 나갔다.
1925년 쑨원이 죽고, 장제스가 국민당의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장제스는 군벌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중국 북부에서 중화민국의 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해북벌을 준비하였다. 당시 국민당은우파와좌파로 분열되었고, 공산당이 계속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1926년3월중산함 사건으로 국민혁명군 내의 공산당원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국민당 내 우파(장제스 계열)와 좌파(공산당 계열)의 대립은 격화되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장제스의국민혁명군은 민중의 지지로후난성,후베이성,푸젠성,저장성,장시성,안후이성의 6성을 국민당의 세력 안에 편입시키며우페이푸(吳佩孚),쑨촨팡(孫傳芳) 등의 군벌을 격파하였고,만주 군벌장쭤린과 대치하였다.
1927년3월상하이의노동자들이 무장봉기하여 장제스 군대를 맞아들였다. 장제스는 이를 자신에 대한 민중의 지지로 확신했고공산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싫어하는 상공인과 부유층이 중국공산당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부추기자, 그해4월 12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처형을 벌여(4·12 사건) 중국공산당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지하로 숨어들게 되었다. 이로써 제1차 국공 합작이 결렬되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분열되어 첫번째 국공 내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장제스는 농촌 지역에서 끊임없이 세력을 키우고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구성하는 공산군을 토벌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이를 '토공전'(討共戰)이라 한다. 공산당의 군사 조직인홍군은 종종 홍비(紅匪) 또는 공비(共匪)로 불렸다.
이러한 대규모 토벌 작전에도 불구하고 장제스의국민혁명군은 홍군을 완전히 분쇄하지 못했는데 이는 인력과 물자가 부족한 홍군이 철저한 게릴라식 유격 전술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대규모 토벌전에서 국민혁명군은 종전의 토벌 방식을 바꾸어 대규모 진지, 토치카를 짓고 지구전적인 진지전을 펼쳤는데, 홍군은 이 전술에 말려들어 수도인장시성을 잃게 될 위험에 처하였다.
이때 홍군은 필사적인 후퇴 전술을 택해중국 대륙을 돌아서산시성에 이르는 이른바장정을 감행하고국민혁명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새로운 수도를 찾게 된다. 홍군의 주력은 무사히즈단현에 도착하고 그곳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군벌 출신의장쉐량과 대치했는데, 장쉐량은 공산당에 동조적이고 공산당이 주장하는 항일 정신에 경도되었다. 마침내1936년 12월 장쉐량은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를 설득,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 통일 전선이 성립하게 된다.
일본이 패망한 직후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에는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점령지 정리 등을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되었다. 오랜 전쟁에 지쳐 있던 양측은 내전을 피하기 위해 1945년 8월부터 약 한 달 반 동안충칭에서장제스와마오쩌둥이 만나 회담을 가졌고, 같은 해 10월 내전을 피하고 정치적 민주화를 추진하는 것에 관한 합의가 도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양측 간의 갈등이 더욱 커지자, 미국의마샬 장군이 중재에 나서 내전을 피할 공동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협상이 1946년 1월부터 시작되었고 어느 정도 합의에 다다랐다. 그러나 이를 인준하는 과정에서 국민당이 다시 합의안을 번복하고 공산당이 이에 항의하면서 결국 공동 정부 구성에 실패하였다.
1946년 6월국민혁명군은 본격적으로 공산당 지구를 침공하여 전면적인 내전을 개시하였다. 초기에국민혁명군은 병력, 장비, 보급 등 모든 면에서중국 인민해방군(홍군)보다 우세했고, 특히 미국의 지원을 받아 무장하고 있어서 내전은 곧 종식될 듯이 보였다. 특히 1947년 3월에는후쫑난이 지휘한 20만의 병력이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수도인옌안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리하게 점령지를 늘린국민혁명군(→1947년 12월중화민국 국군)은 병력을 지나치게 분산시키는 전략적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게다가 국민당 정부의 총체적 부패, 인플레로 인한 경제 붕괴, 그리고 이미 떠난 민심이 어우러져 1948년 가을부터는 공산당 측에 유리하게 내전이 전개되었다.1948년 11월린뱌오가 지휘한 동북 인민해방군이 만주에서중화민국 국군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요심전역)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힘의 균형이 깨졌다.인민해방군은1949년 1월 31일베이징에 입성하였고, 파죽지세로장강(창강, 양쯔강)을 건너 4월 23일에는 국민당 정부의 수도난징을 함락시키고, 5월 27일 중국 대륙 최대 도시상하이까지 손에 넣었다.
1949년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국가주석에 취임하였다.중국 인민해방군은 같은 해 10월 14일에는광저우를 접수하고, 11월 30일에는중화민국 정부의 임시수도였던충칭(重慶)마저 함락시켰다. 12월 10일장제스는 대륙 최후 거점인청두(成都)에서타이완(臺灣, 대만)으로 탈출했고, 12월 27일중국 인민해방군이 청두에 입성함으로써 대륙에서 국민당을 완전히 몰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