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慶州市)는 대한민국경상북도 동남부에 있는시이다. 시청 소재지는동천동이고, 행정구역은 4읍 8면 10동이다. 인구는 2022년 기준 247,489명이다.
기원전 57년신라의 건국부터 시작해서 935년 신라 멸망까지 992년 동안신라의 수도였고,서라벌(徐羅伐), 금성(金城) 등으로 불렸다. 신라가 멸망한935년(고려 태조 18년)에 현재의 지명인 '경주'로 바뀌었다. 이후 동경(東京), 계림부(鷄林府) 등으로 바뀌었다가조선 시대에 다시 경주로 바뀌었으며,영남남인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3]
18세기 만들어진 지방 지도의경주읍성 일대 부분으로 경주(慶州)라고 적혀 있다.황룡사지에 있었던황룡사의 복원모형.
삼한 시대에 '사로국'이라는 이름으로 비(非)한국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 한국의 기록(아마도 신라의 왕조 실록을 기반으로 한 자료)에 따르면, 사로국은 기원전 57년 경주 지역의 여섯 개 마을이 박혁거세를 중심으로 통합되며 세워졌다고 한다. 이후 왕국이 성장하면서 국호를 신라로 변경했다. 신라 시기, 이 도시는서라벌이라 불렸으며, 이 지명은 훗날 '서울'처럼 '수도'를 의미하는 일반 명사로 발전하게 된다. 또계림(鷄林, 닭의 숲)'이나금성(金城, 금의 성 또는 철의 성, 즉 난공불락의 요새)'이라는 이름도 사용되었다. 계림에 대해서는 닭·달·ᄃᆞᆯ + 벌로 재구하여 월성(月城), 양부(梁部)와 같은 단어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4] 닭(鷄)을 훈음차 새(鳥)로 해석하고 수풀(林)과 합쳐 새불 즉 서벌, 서라벌과 같은 의미로 보는 견해가 있다.[5]
668년신라가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를 통일한 후, 경주는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신라 왕실과 대부분의 귀족들이 이곳에 거주했으며, 그 번영은 전설처럼 전해졌고, 9세기 아랍의 지리서 『도로와 왕국의 책』에는 페르시아까지 그 명성이 알려졌다고 한다.『삼국유사』는 경주의 전성기 가구 수를 178,936호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당시 인구는 거의 백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경주의 대표 유적 대부분은 이 통일신라 시대(10세기 초 고려의 건국으로 종결)에 조성된 것이다.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 이후, 경주는 수도의 지위를 잃었다.940년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은 도시 이름을경주(慶州)로 바꾸었는데, 이는 "경사로운 고을"이라는 뜻이다.
987년, 고려는 수도 개경 외에 3개의 보조 수도를 세우는 제도를 도입했는데, 경주는 "동경"(東京, 동쪽 수도)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1012년 현종 3년에 이 칭호는 폐지되었다. 이후 경주는 영남도 관찰사가 머무는 행정 중심지로 지정되었다. 당시 경주는 영남 중동부 대부분을 관할했으나, 13세기에 들어 행정 구역은 크게 축소되었다. 조선시대(1392–1910)에 접어들며 국가 차원의 중심지는 아니었지만, 지역적인 영향력은 여전히 유지되었다.1601년에는 도청 소재지로서의 지위도 상실하게 된다.
13세기에는몽골군이황룡사에 있던 9층 목탑을 파괴했다.임진왜란 당시에는 경주 지역이 격전지로 변하며, 일본군은 불국사의 목조건물들을 불태웠다. 침입 외에도 조선 초기에는 유교 성리학자들이 남산의 불교 조각상을 훼손하며 팔이나 머리를 파괴하기도 했다.
20세기 초, 경주는 규모가 작은 도시로 남았고, 주요 도시의 지위를 잃었다. 이 시기에는 특히 고분 내부에 대한 고고학 발굴이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수많은 무덤들이 오랜 세월 동안 거의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발굴된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1915년에는 현재국립경주박물관의 전신인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일제강점기 후반, 경주는 철도 교차 지점으로 성장했으며, 동해남부선과 중앙선이 건설되며 경주는 중일전쟁 대비와 동해 자원 개발을 위한 교통 요지로 활용되었다.광복 이후인1945년 한국 사회는 전반적으로 큰 혼란에 빠졌고, 경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해외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현재 동천동 일대에 귀환민 마을이 조성되었다. 특히 이 시기 경주는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한 게릴라 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으로 알려졌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경주는 비교적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전쟁 기간 동안 대부분의 시간 동안 경주는 남한의 통제 아래 있었으며,1950년 말 잠시 포항에서 밀려 내려온 북한군이 접근하면서 일부 지역이 전선에 포함되기도 했다.
1955년9월 1일 경주군 경주읍과 내동면 등이경주시로 승격되고, 경주군은월성군(月城郡)으로 개칭되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며, 경주는 인근 지역 산업화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다.1973년 인근 도시 포항에 포스코 제철소가 가동을 시작했고, 같은 해 울산에는 대규모 석유화학 단지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산업 기반은 경주의 제조업 발전에도 큰 힘이 되었다.
2024년APEC 정상회의 개최지로 최종 선정되었으며,2025년10월 31일부터11월 1일까지 이곳에서APEC 경주 정상회의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 본 회의에서는 디지털 전환, 기후변화 대응, 포용적 성장 등 주요 의제가 논의되었고, 회원국 간 협력 강화를 위한경주 선언이 채택되었다.
해안 도시이자대구광역시같은 분지 도시로,태백산맥의 하단부에 위치한침식 분지 지형이자, 해발 100m 이하의 저지대와 100~200m의 구릉성 산지가 대부분인형산강지구대에 속한다. 서쪽에는 단석산계, 동쪽에는 동대산계가 있으며 두 산계에 따라 해안, 평원, 산악지방으로 구분된다.[8] 중앙인 평원지방에는형산강이 포항시 방향으로 흐르며, 그 주위로충적평야인 형산강평야가 좁고 길게 펼쳐지는데, 이곳에 경주 시가지가 있다.
비교적 낮은 산맥들이 구석구석에 펼쳐져 있으며, 서쪽 가장자리를 따라 자리잡은태백산맥이 높은 편이다. 경주에서 가장 높은 산은 해발 1013m의문복산이며 청도군과의 경계가 되고 있다. 경주시의 서쪽이자 태백산맥의 동쪽의 봉우리들은주사산맥에 속해 있고, 동쪽의 산들은동대산맥과 기타 작은 산맥들에 속해 있다. 시가지를 중심으로 서쪽에구미산, 남서쪽으로단석산, 남쪽으로남산(금오산), 동쪽으로는 높이 745m의토함산 등의 산이 있으며, 비교적 작은 산으로 소금강산, 명활산, 낭산 등이 있다.
하천의 방향은 산맥에 따라 나타난다. 동쪽의 동대산맥에서는 동해로 흐르는 작은 하천과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으로 나뉘며, 시의 중앙부에서는 형산강으로 유입되어 포항시의영일만으로 흘러간다. 남부지역의 하천은태화강으로 향하여 울산만으로 빠져나가며, 태백산맥 너머 서부지역에는낙동강으로 흘러가는동창천이 있다.
북쪽의 포항과 남쪽의 울산을 사이로 33km의 해안선이 있다. 큰섬이나만은 없으며 해안은 하천에 의해 조금씩 만입되어 있다. 이 때문에 큰 항구는 없으나 어업 등을 위한 12개의 소규모 항구가 있다.
해안의 위치 때문에, 경주는 한국의 내륙 지역보다 약간 온화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도시의 기후는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기후이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시원하며 6월 말부터 8월 초 사이에우기가 온다. 한국의 나머지 동해안에서도 가을태풍이 드물지 않다. 연평균 강수량은 1,091 밀리미터 (43.0 in)이고 연평균 최고 기온은 8.6–31.1 °C (47–88 °F)이다.[9]
경주의 역사적인 중심지는 경주 분지의 형산강둑에 있다. 이 저지대는 종종 태풍으로 인해 역사적으로홍수가 반복되어 왔다. 평균적으로 1세기부터 시작하여 27.9년마다 홍수가 발생한다고 보고되고 있다.[10] 현대의 홍수 통제 메커니즘은 20세기 후반에 홍수의 급격한 감소를 가져왔다. 마지막 대형 홍수는 1991년태풍 글래디스로 덕동호 저수지가 범람하면서 발생했다.[11]
경주시의 행정구역 면적은 1,324.41km2로,경상북도에서안동시에 이어 두 번째로 넓은기초자치단체이다. 도시 지역인 시내행정동(洞) 면적은 221.3km2이다. 행정구역은 4읍 8면 10행정동으로 구성되며, 그 아래 186법정리·동, 301행정리, 332통, 3,200반으로 나뉜다. 시청 소재지는 동천동이다.
신라시대 경주의 인구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의 전성기에 도읍(경주)에는 178,936호가 있었다.(新羅全盛之時 京中十七萬 八千九百三十六戶)라 하여 90만 명에서 120만 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당대아바스 칼리파국의바그다드,당나라의장안과 함께 당시 아시아 3대 도시에 속한다고도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규모는 인구 25만명으로 추산되는 발해의 상경용천부의 5배 이상의 수치로 만주지역을 제외한삼한을 통일한 신라의 국력을 상징한다.
1945년 광복 이후,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 경주군의 인구는 22만 2천명이었고,1955년에 승격 당시에 경주시·월성군의 인구는 22만 9천명이 증가하였다.1960년대과1970년대 이후에울산공업단지와포항제철의 발달로 인한 도시화에 따라 전출자가 많이 생겨나서 일시적으로 인구증가율 감퇴를 보였다.
이후 인구가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반복하는데 장기적으로는 인구가 감소 중이다. 2020년 기준으로는 25만 3천여 명이다.경상북도에서 네번째로 인구가 많은 시다.
종교의 경우, 경주는 전통적으로불교와유교의 세력이 강한 지역이다.불교는대한불교조계종 중심으로 교세가 강하다.
경주시는대한민국의 주요 관광지로, 도시 곳곳이유적지나 고대 유물들로 채워진 박물관 도시이다. 가는 곳 마다 그 옛날 문화의 정수를 담은 사찰, 석불 등 많은 사적지와 유물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찬란했던 그 때의 문화와 예술 그리고 왕조의 영화를 더듬을 수 있다.신라 천년의 고도를 자랑하는 경주시는 최근 국제회의나 엑스포 축제를 성공리에 개최하여역사적으로 유명한 이미지뿐만 아니라 국제적 위상까지 성공적으로 끌어올렸다.
문화유산 보유율은 전국의 5.5%,경상북도의 30%로 총 합계 396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국가지정문화재의국보 30점,보물 76점,사적 72점,중요민속자료 16점, 기타 6점이며, 도지정의유형문화유산 28점,무형문화유산 1점,기념물 17점,민속자료 4점이 있다. 그 외 문화재자료 39점, 비지정문화재 107점으로 방대한 양의문화재가 있다.
다만 문화재가 많다는 특성이 오히려 시의 발전에는 저해 요소가 되고 있다. 시내권에는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고도 제한이 걸려 있으며, 그 외에도 문화재 보호 때문에 개발이 제한되어 있다. 이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근처의 울산, 포항, 대구 등에 밀리기 시작했고,경상북도에서는경산시에도 밀리면서 도 내에서는 제4의 도시다. 경주시의 공업 지역은 시내권에 들어설 수 없어서, 울산과 포항 경계 방향의 외곽 지역으로 가야 볼 수 있다.
신문사는 지역 신문인 황오동에 위치한경주신문과 동천동에 위치한서라벌신문이 주간지로, 대구·경북 지역인 황성동에 위치한경북신문이 일간지가 발행한다. 대학 신문인 신경주대학보, 동대신문, 위덕대신문 등이 있다. 방송사는 경주, 청도, 영천, 경산 지역인 성건동에 위치한LG 헬로비전 신라방송이 있다.
생산 취업 인구 중 농업 인구와 서비스 부문에 종사하는인구가 많은데, 이를 농업 도시로서의 성격과 관광지로서의 지위가 높은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경지 면적은 전체 면적의 약 19%로 적으나, 도시 근교농업과축산업이 발달했다. 특히 촉성재배(참외·토마토)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며, 서울을 비롯하여 주요 도시에 많은 양을 공급한다.
관광 도시이기 때문에, 자연히 서비스업의 비중도 높다. 외지인을 상대하는 관광업으로 얻는 수입이 지역 경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형산강이 합류하는 경주 분지에 자리잡은경상북도 남부 지역의문화재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공업보다는 농업과 서비스업의 비중이 높은도시며, 공업 지역은 주로 시 외곽의 울산광역시 혹은 포항시 경계와 가까운 쪽에 있다.
경지 면적 25,763.1㏊ 중에서논 17,659㏊,밭 8,104㏊로서 논이 훨씬 많다. 주요농산물은쌀·콩·채소·사과·감·소·닭 등이다.
광업의 경우갈탄의 매장이 있고 고령토·불석·규조토를 비롯 납석 광선도 생산한다. 이 지방 특산물인법주는 외국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고, 제면·유기:특산물, 공업에 있어서도 가내 수공업으로유기·창호지·무명·베죽·제품 등과수산 가공업으로 한천·통조림 등이 있다. 용강공단에는 약 67개공장이 입주해 있다. 월성군(현:경주시)에서 생산되는 창호지는 경주지로 알려져 있다.
관광업이 지역 경제의 핵심이기 때문에, 경주의 경제 구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서비스 분야다. 경주에서 가장 오래된재래시장은 경주공설시장(중앙시장)[22]과옛 경주역 건너편의 성동시장 등이 시내 한복판에 있다. 그 외의 건천, 감포, 안강, 불국사 등지에도 시장이 존재한다.2001년11월에 경주 최초의 대형 할인마트인홈플러스 경주점이용강동에 열렸다. 개점 당시홈플러스 경주점이 문화유적지에서상업 시설을 짓는데 따르는 법적 제한이 많고, 상권이 작아서 슈퍼스토어형 모델 점포로 지어졌으며 주차장은 지상 1층에 연결되어 있다.[23]
시중은행 가운데 경주시에 지점 · 출장소를 둔 은행은신한은행 (경주·경주법원·동국대 WISE캠퍼스)·SC제일은행 ·하나은행 ·우리은행 ·KB국민은행 (경주) ·중소기업은행 ·iM뱅크 (경주·경주시청·황성·용강)이 있다.농협은NH농협은행 경주시지부(노동동)와 단위농협 9개(경주, 산내, 동경주, 불국사, 신경주, 양남, 외동, 천북, 현곡)가 있다.수협은수협은행이 없고 단위수협인 경주시수협만 있으며, 1개 지점(감포)과 2개 지소(경주 · 황성)가 있다.
동국대학교 경주병원
경주시에는 인구에 비하여 많은 병·의원이 밀집해 있으며 종합병원 2개소(경주동산병원, 동국대학교 경주병원)가 있다.
2007년을 기준으로 경주시는 공공체육시설로 2개의 종합경기장, 2개의 실내체육관, 2개의 테니스장, 1곳의 수영장 등을 갖추고 있다.[33][34]
울창한소나무 숲으로 에워싸인황성동황성공원은 1,022,350m2의 면적 내에 각종 공공체육시설을 구비한다. 과거 이곳은 신라시대 때풍수사상에 따라 인공적으로 조성된 숲인 독산에서 유래하며,화랑들의 훈련장이자 각종 놀이가 행해진 여가 활동장이었다. 왕들의사냥터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특히 제26대진평왕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황성공원은 1975년도시근린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종합경기장인 경주시민운동장과 7개의 축구장으로 구성된 축구공원과 1개의풋살구장, 1개의 실내체육관, 전통스포츠를 위한국궁장인 호림정과 15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씨름장 등이 각각 있다.게이트볼장과인라인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연습장을 갖추고 있으며, 산책로를 따라 산책하거나자전거를 타고 돌 수 있다.
경주시민운동장은 1982년에 개장하였으며[33], 약 2만명의 관객을 수용한다.[35] 이 곳에서 2005년 5월 7일부터 이틀간 ‘제4회 여성부장관기 전국여성 축구대회’가 열리기도 하였다.[36] 한편 경주시민운동장에서 매년동아경주마라톤대회가 매년 10월 중순 일요일에 열린다.[37]
경주시는 대한민국에 4개의 여자필드 하키 실업팀 중 하나인경주시청 하키 팀의 연고지로, 안강운동장 하키장에서 훈련하고 있다.[38][39] 경주시청 여자하키팀은 1984년에 창설되었으며[40], 경주시의 체육청소년과가 관할한다.[41] 하키팀의 창단 이후 약 10년 성적부진으로 인해 해체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점차 성적이 개진되어 2000년도에는 종별선수권 대회와 전국체전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2002년 8월을 기준으로 그해 1번과 우승과 3번의 준우승의 성적을 거두었다.[40] 2008년 8월 제51회 전국종별하키선수권대회서 우승을 거두으며, 그해 3월 2008년 전국춘계남여하키대회와 6월 협회장기 전국하키대회에서 각각 3위 등을 차지하였다.[42]
또한성동동에 있었던 기존구 경주역으로 다녔던 철로가 문화재와 인접한 지역으로 지나갔기 때문에, 유네스코의 권고로 중앙선과 동해선을 이설하면서 신경주역으로 통합했다. 이에 따라 기존성동동 경주역은2021년12월 28일에 폐역됐으며, 철도교통 체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모량역도 이전하여 경부고속선(건천연결선), 동해선, 중앙선의 신호장으로 개편했다.성동동 옛 경주역 시내버스 정류장은 "경주성동시장"으로 정류장명을 변경했다.
그 외에건천역이 폐역과 함께아화역과 통합되고,구 서경주역을 나원역과 통합한 후 폐역하면서 나원역이서경주역으로 역명을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