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 기간은 1031년~1034년이며, 이름은 왕흠(王欽)이고 자(字)는 원량(元良)이다.현종(顯宗)의 장남으로, 어머니는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金氏)이다. 비는 현종의 딸경성왕후(敬成王后)와효사왕후(孝思王后), 그리고왕가도(王可道)의 딸경목현비(敬穆賢妃)이다.
1020년(현종 11) 연경군(延慶君)에 봉해진 뒤 1022년(현종 13) 태자에 책봉되었고, 1031년(덕종 즉위년) 중광전(重廣殿)에서 즉위하였다. 그 해강감찬(姜邯贊)이 죽자 그를 현종 묘정에 배향하였다. 과거제의 개혁도 단행하였다. 과거의 예비시험인국자감시(國子監試)를 처음으로 설치하고 육운십운시(六韻十韻詩)로 시험을 보게 하여 합격자를 뽑았다. 입춘 뒤의 벌목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1032년(덕종 1)거란(契丹)의 사신이내원성(來遠城)에 오자 받아들이지 않고,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삭주(朔州)·영인진(寧仁鎭: 현 함경남도 영흥군)·파천(派川: 현 함경남도 안변군)에 성을 쌓았다.
이에 앞서 거란에 사신을 보내 압록강의 성교(城橋)를 헐고 억류된 우리 사신의 송환을 청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신하들과의 논의를 거쳐 현 황제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전 황제인성종(成宗)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였고 하정사(賀正使)의 파견을 중지하는 등 자주적인 외교를 펼쳤다.
그해 왕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하던 것을 응천절(應天節)이라 고쳤다. 또왕가도(王可道)를감수국사(監修國史)로,황주량(黃周亮)을수국사(修國史)로 삼아 현종 때 착수한 국사편찬사업을 완성하였다.
1033년(덕종 2) 평장사(平章事)유소(柳韶)에게 압록강 어귀에서 서북면(西北面)의 위원(威遠: 현 평안북도 의주군)·정주(靜州: 현 평안북도 의주군)·운주(雲州: 현 평안북도 운산군)·안수(安水: 현 평안남도 개천군)·청새(淸塞: 현 평안북도 희천군)·영원(寧遠)·맹주(孟州: 현 평안남도 맹산군)·삭주(朔州) 등의 13성(城)과 동북면(東北面)의 요덕(耀德: 현 함경남도 영흥군)·정변(靜邊: 현 함경남도 영흥군)·화주(和州: 현 함경남도 영흥군) 등의 3성을 연결해 동해 도련포(都連浦)에 이르는장성(長城)을 쌓게 하였다. 이는 1,000여 리가 되는 석성(石城)으로, 높이와 두께가 각각 25척이었다.
1034년(덕종 3) 양반 및 군·한인(軍閑人)의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였다. 그해 병으로 아우평양군(平壤君: 정종(靖宗))에게 양위하였다.
시호는 경강(敬康)이다. 능은 숙릉(肅陵)으로 북한 개성특별시 해선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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