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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면 다른 것은 인식하지 못하는 현상. 집중할 때 주의를 분산시키지 않으려는 뇌의 특성으로 인해 나타난다. 인간의 주의력에 한계가 있다는 뜻으로, 운전 중 전화를 하는 행위 등이 위험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된다. 무주의 맹신을 인정하지 않는 시각적 확신은 오히려 판단을 그르치게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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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치기미국 하버드대학의 크리스토퍼 차브리스(Christopher Chabris, 1966~)와 일리노이대학의 대니얼 사이먼스(Daniel Simons, 1969~)는 농구공을 패스하는 두 팀이 나오는 짧은 동영상을 만들었다. 한 팀 학생들은 흰색 셔츠, 한 팀 학생들은 검은색 셔츠를 입게 했다. 동영상 시청자들에게는 흰색 셔츠를 입은 팀의 패스 횟수를 세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동영상을 시청하는 학생들이 몰입과 집중을 하는 동안, 고릴라 복장을 한 한 학생이 코트를 가로질러 천천히 걸으며 가슴을 두드리는 등의 행동을 한다. 무려 9초 동안. 그런데, 동영상을 보면서 패스 횟수를 세던 수천 명의 학생 중 절반 정도는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고릴라가 등장하지 않았다고 우기기까지 했다.각주1)
이른바 '투명 고릴라 실험'으로 알려진 유명한 연구 결과다. 이 실험은 1999년 『퍼셉션(Perception)』에 발표되면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 고릴라 동영상이 영국 BBC-TV를 통해 방영되었을 때, 이를 시청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놀라워요. 내가 고릴라를 보지 못하고 지나쳤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정말, 정말 믿어지지 않아요!" "삶 속에서 놓치고 지나가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전문가들은 좀 다르지 않을까? 수년 동안 이 고릴라 비디오를 '믿음의 힘'을 주제로 한 대중강연의 부교재로 활용해온 미국의 과학 저널리스트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 1954~)는 자신이 경험한 놀라운 사실을 털어놓는다.
"가장 많이 고릴라를 보지 못한 사람들은 약 1,500명가량의 행동심리학자들 그룹이었다. 이들은 행태 관찰 전문가들이었는데, 고릴라를 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들 중 다수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일부는 내게 자기들에게 보여준 것이 2개의 다른 비디오였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런 종류의 실험은 우리가 스스로의 지각력에 대해 터무니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준다."
심리학자 김정운도 기업 강연을 할 때마다 이 고릴라 비디오를 보여주며 실험을 했는데, 기업의 임원들일수록 고릴라를 보지 못한다고 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장사가 잘될수록,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느라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영국 미래학자 리처드 왓슨(Richard Watson, 1961~)은 이 실험의 의미에 대해 "우리는 명백한 것조차 못 볼 수 있으며, 자신이 뭔가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며 이렇게 말한다. "이 실험의 핵심은 우리의 관심은 무한한 자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관심은 유한하며, 따라서 우리가 무엇 내지는 누구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지 매우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이 실험에서 나타난 현상을 가리켜 'inattentional blindness'라고 한다. 1992년 아리엔 맥(Arien Mack)과 어빈 록(Irvin Rock)이 만든 말로, 이들이 1998년에 출간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우리말로는 '무주의 맹시', '부주의맹', '시각적 맹목성' 등으로 번역해 쓰고 있다. 어떤 교수는 이런 현상을 가리켜 "우리의 눈은 물체를 응시하고 있으나 뇌는 그렇지 않은 현상"이라고 했다.
차브리스와 사이먼스는 "주의력 사용은 제로섬게임과 같다. 무엇 하나에 주의를 기울이면 다른 것에는 당연히 주의를 덜하게 되기 때문이다. 유감스럽지만 무주의 맹시는 주의력과 인식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면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산물이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본질적으로 무주의 맹시를 없앤다는 것은 사람에게 팔을 아주 빠르게 움직여 날아보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날 수 없듯이 우리의 정신구조 역시 주변의 모든 것을 인식할 수는 없게 만들어져 있다.……사실 무주의 맹시는 주의력이 작용한 결과로서 정신을 집중하는 우리의 예외적인(예외적으로 유용한) 능력에 대한 대가이다. 집중할 때 우리는 주변의 다른 것에 주의를 분산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집중력은 우리가 주의를 분산시키지 않고 제한된 자원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돕는다."
토머스 대븐포트(Thomas H. Davenport)와 존 벡(John C. Beck)도 『관심의 경제학(The Attention Economy)』(2001)에서 "비록 무주의 맹시라는 개념이 우리가 주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놓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더라도, 한편으로는 우리가 하나의 일에 계속해서 집중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좋은 징조라고도 볼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요구되었던 것과 같이, 다른 일들은 배제하고 어느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관심 병목(attention bottleneck)을 거쳐 지각 단계에 이르게 하는 과정을 우리가, 적어도 우리의 의식적인 마인드가 통제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예일대학 교수 브라이언 스콜(Brian J. Scholl) 연구팀은 '투명 고릴라 실험'을 변형시켜 원래대로 과제를 수행한 팀과 휴대전화로 통화하면서 동시에 과제도 수행한 팀을 비교했다. 2003년에 발표된 이 연구에선, 전자는 30퍼센트가 고릴라를 보지 못한 반면 후자는 무려 90퍼센트로 뛰어올랐다. 단순한 통화가 예상치 못한 사물을 못 보게 만들 가능성을 3배나 높인 것이다.
이 실험 결과는 '운전 중 전화통화'의 위험성을 시사해준다. 핸즈프리 전화기(hands-free phone)를 쓰면 안전할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차브리스와 사이먼스는 "문제는 손이나 눈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문제는 운전 행위에 따르는 한계가 아니라 주의력 자원과 인지가 갖는 한계다. 사실 정신을 산만하게 한다는 점에서 손에 드는 전화기나 핸즈프리 전화기는 거의 차이가 없다. 같은 방식, 같은 정도로 정신을 산만하게 한다.……거듭되는 실험에서도 손에 드는 전화기보다 핸즈프리가 더 낫다는 사실을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운전 중에는 핸즈프리를 사용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사람들의 믿음이 더 확고해진 것은 손에 드는 전화기의 사용을 금지하는 법률이 낳은 모순적 결과인지도 모른다."
핸즈프리가 위험하다면 차를 함께 탄 사람과의 대화도 위험하지 않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겠지만, 차브리스와 사이먼스는 그건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은 그 이유에 대해 "첫째, 통화 상대보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말을 듣고 이해하기가 더 쉽기 때문에 대화하는 데 그다지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둘째, 옆에 앉은 사람은 도로 상황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알아차리면 운전자에게 알려줄 수 있지만, 통화 상대는 그렇게 해주지 못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통화와 동승객과의 대화가 차이를 보이는 이유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대화의 사회적 요구라는 특성과 관련 있다. 동승객은 당신의 상황을 인지하고 있다. 따라서 운전 중 위험한 상황이 발생해 대화가 끊기면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운전이라는 상황이 동승객의 사회적 상호작용에 대한 기대치를 조정하기 때문에 당신이 계속 이야기를 해야 하는 사회적 요구도 있다. 그러나 통화 상대는 당신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가 시작할 거라고 예상할 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당신은 운전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 사회적 요구를 느끼게 된다."
우리가 전체를 한번에 다 보지 못하는 현상을 잘 이용하는 것이 바로 마술이다. 마술사들의 손이 우리의 눈보다 빠르기 때문에 '속임수'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유명 마술사 데이비드 코퍼필드(David Copperfield)는 "만약 내가 당신의 주의를 모으고 그것을 특정 대상에 고정시킬 수 있으면 당신이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도 알아채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마술은 재미있게 즐기는 것이지만,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 나타나는 '무주의 맹시'는 결코 즐길 수 없는 것이다. 데이비드 맥레이니(David McRaney)는 『착각의 심리학(You Are Not So Smart)』(2011)에서 '무주의 맹시'의 문제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주의 맹시의 문제점은 너무 자주 일어난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무주의 맹시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 앞에 펼쳐진 온 세상을 본다고 믿는다. 증언이나 면밀한 조사가 중요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인식과 기억이 완벽하다고 믿는 경향 때문에 본인의 마음과 다른 이들의 마음을 판단할 때 실수를 빚게 된다. 인간의 눈은 비디오카메라가 아니고, 따라서 인간의 기억 또한 비디오가 아니다."
무주의 맹시는 그간 세속적 진리로 통용되어 온 "Seeing is believing(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 즉 "말로만 백 번 듣는 것보다 실제로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속설에 함정이 있으며, 따라서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시사한다. 맥레이니의 말처럼, 문제는 무주의 맹시의 발생이 아니라 그걸 인정하지 않는 우리의 시각적 확신이다.
과학 작가 이은희가 잘 지적한 것처럼, '모든 걸 다 볼 수 없다고 인정하는 자세'를 가질 때에 비로소 '서로 시각이 다른 현실에서 내 눈으로 본 것만이 옳은 것이라며 핏대를 세우고 서로를 헐뜯는 일'이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니까!" 우리는 절대 움직일 수 없는 확신을 갖고 이런 말을 하지만,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것에 대해선 어찌 할 것인지 우리 모두 자문자답해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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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리처드 와이즈먼(Richard Wiseman), 박종하 옮김, 『왜 나는 눈앞의 고릴라를 못 보았을까?: 눈앞에 감춰진 성공의 기회를 알아채는 4가지 방법』(세종서적, 2004/2005), 19~20쪽.
- ・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 박종성 옮김, 『경제학이 풀지 못한 시장의 비밀』(한국경제신문, 2008/2013), 146쪽.
- ・ 김정운, 『에디톨로지: 창조는 편집이다』(21세기북스, 2014), 21~22쪽.
- ・ 리처드 왓슨(Richard Watson), 이진원 옮김, 『퓨처마인드: 디지털문화와 함께 진화하는 생각의 미래』(청림출판, 2010/2011), 131쪽.
- ・ 노리나 허츠(Noreena Hertz), 이은경 옮김, 『누가 내 생각을 움직이는가: 일상을 지배하는 교묘한 선택의 함정들』(비즈니스북스, 2013/2014), 40쪽.
- ・ 토머스 데이븐포트(Thomas H. Davenport)·존 벡(John C. Beck), 김병조·권기환·이동현 옮김, 『관심의 경제학』(21세기북스, 2001/2006), 99쪽.
- ・ 크리스토퍼 차브리스(Christopher Chabris)·대니얼 사이먼스(Daniel Simons), 김명철 옮김, 『보이지 않는 고릴라』(김영사, 2010/2011), 46~50쪽, 66~67쪽.
- ・ 조현준, 『왜 팔리는가: 뇌과학이 들려주는 소비자 행동의 3가지 비밀』(아템포, 2013), 136~137쪽; 「Inattentional blindness」, 『Wikipedia』; 캐스 선스타인(Cass R. Sunstein), 장경덕 옮김, 『심플러: 간결한 넛지의 힘』(21세기북스, 2013), 253쪽.
- ・ 데이비드 맥레이니(David McRaney), 박인균 옮김, 『착각의 심리학』(추수밭, 2011/2012), 221쪽.
- ・ 이은희, 「두 눈 똑똑히 뜨고도 고릴라를 못 본 이유는?」, 『한겨레』, 2014년 10월 25일.
글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사회에 의미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 대표 저서로는 <강남 좌파>, <한국 현대사 산..펼쳐보기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사회에 의미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 대표 저서로는 <강남 좌파>, <한국 현대사 산책>(전 23권), <미국사 산책>(전 17권) 등이 있다.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사회에 의미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 대표 저서로는 <강남 좌파>, <한국 현대사 산..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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