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이 광활한 우주에 우리뿐이라면, 그건 너무도 큰 공간의 낭비가 아닐까.
- 칼 세이건(Carl Sagan, 1934~1996)
지구는 우주의 중심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이 대중을 상대로 천문학 강연을 할 때였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태양은 다시 '우리 은하'라고 부르는 엄청난 별들의 중심 주위를 돌고 있다고 설명하자 몸집이 작은 노부인이 뒷자석에서 일어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한 말은 모두 쓰레기 같은 소리야. 내가 사실을 얘기하리다. 이 세계는 거대한 거북 등에 얹힌 납작한 판이라오." 러셀은 웃으며 물었다. "그러면 그 거북이는 어디에 올라서 있나요?" 그러자 그 부인은 한심하다는 투로 대꾸했다. "이봐요, 젊은 양반. 아니 그것도 모른단 말이오? 그 아래는 모두 거북이들이라니까, 글쎄!"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논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다. 특히 옛날 사람들에게 하늘의 별을 관찰하는 일은 신의 계시를 따르는 종교적 행사뿐 아니라 계절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 그리고 언제 농사를 시작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중요한 문제였다.
기원전 2세기, 그리스의 위대한 천문학자 히파르코스는 기하학의 단순한 정리들을 이용해 지구와 천체 모두에 적용할 수 있는 삼각법을 발명했다. 두 개의 크기가 다른 삼각형에서 두 각이 서로 같다면 우리는 그것을 닮은꼴이라고 부른다. 만일 두 삼각형이 닮았다면 그에 대응하는 두 변의 길이의 비가 같아진다.
그는 이러한 성질을 이용해 지구의 크기를 측정하고,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를 계산했다. 히파르코스가 발명한 수학은 그 후 수많은 실용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사용되었다. 거기에는 지리적인 탐사와 항해, 그리고 지도 제작도 포함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 사람들은 원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도형이며, 원운동이 가장 완벽한 운동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지구와 태양, 달을 비롯한 모든 행성들은 둥근 형태이고, 하늘의 별들도 원을 그리며 돈다고 믿었다. 하지만 행성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도표로 만드는 것과 천체들의 운동 원리를 찾아내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그리스 천문학은 140년경 프톨레마이오스가 저술한 『알마게스트』에서 절정에 이르렀는데, 우리가 흔히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라 부르는 그의 우주 모형에는 지구가 중심에 놓여 있고, 그 주위를 태양과 달 그리고 다섯 행성들과 별들이 회전하고 있다. 그리고 행성들은 다시 천구면에서 각각의 좀더 작은 원을 그리며 회전한다.
르네상스 시대 이전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이 중세를 지배했다. 인간은 신이 창조한 피조물 가운데 가장 중요하며, 우주는 인간을 위해 특별히 설계되었다는 기독교의 중심 교리는 자연스럽게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과 맞아떨어졌다.
또한 교회 입장에서 볼 때 천구 바깥쪽에 천국과 지옥의 자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유리한 체계였다. 이런 이유로 그 외의 어떠한 천문학적 주장도 이단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이탈리아의 수도사 브루노는 우주가 무한하고 태양계를 비롯해 수많은 세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가 화형을 당했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다
중세 유럽의 몰락을 가져온 첫 번째 계기는 그리스 문명의 재발견이다. 중세 후반인 15세기경 비잔틴, 즉 동로마제국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에 거주했던 그리스 학자들은 투르크족의 침입으로 인해 이탈리아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이를 계기로 그리스 시대의 작품들을 직접 라틴어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마찬가지로 도시와 상인 계급의 성장 역시 르네상스의 부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상인들은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며 자유를 요구했다. 15세기부터 부의 축적을 위한 지리적 탐험들이 줄을 이었다. 콜럼버스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아프리카를 경유하여 중국에 이르는 항로의 발견은 인간의 지평을 확대했을 뿐 아니라 삶의 방식에 관한 많은 지식을 유럽에 가져다주었다.
16세기에는 과학적인 사고의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심에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와 티코 브라헤, 그리고 요하네스 케플러가 있었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에 대한 개념은 그 어느 때보다 큰 저항과 비판에 직면해 있었다.
태양계의 움직임을 설명하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가 도입한 주전원(큰 원의 둘레 위에서 회전하는 작은 원)은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과 달, 그리고 다른 행성들을 연관시켰기 때문에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이 중심에 놓여 있고 지구와 다른 행성들이 함께 태양 주위를 회전한다고 가정하면 대부분의 주전원이 필요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프톨레마이오스의 복잡한 체계는 77개의 원이 필요했는데,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에는 31개만 있으면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은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후 브라헤와 케플러, 갈릴레이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에 의해 비로소 빛을 보게 된다.
탁월한 관찰 능력을 지녔던 네덜란드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는 30년 동안 천문학에 관계된 자료를 철저하게 수집하며 방대한 양의 관찰 기록을 남겼다. 1599년 브라헤의 조수로 일하기 시작한 케플러는 브라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그가 남겨 놓은 관측 자료를 떠맡았다. 케플러는 천체를 수놓은 별들의 수학적 형태에 매료되어 행성의 운동에서 일정한 유형을 찾아내는 데 거의 평생을 바쳤다.
케플러는 브라헤가 남겨 놓은 자료들을 이용해 화성의 궤도를 도출했다. 그는 수백 쪽에 이르는 계산 과정을 '화성과의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두 가지 있었지만, 그 외에는 관찰 결과와 원형 궤도가 잘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케플러는 이 결과에 만족하지 않고 사소한 차이를 꼼꼼하게 계산해서 행성의 궤도가 원이 아닌 타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더 나아가 모든 행성에 적용되는 법칙 두 개를 추가로 만들었다.
케플러의 첫 번째 법칙은 '모든 행성은 태양을 초점으로 하는 타원 궤도를 그리면서 공전한다'는 것으로 '타원운동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것은 과학 역사상 최초로 물체의 운동에 물리법칙이 적용된 예로, 움직이는 물체를 지배하는 법칙과 수학 사이의 놀랄 만한 연관성을 보여 준다. 두 번째는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은 태양에 가까운 곳일수록 빨리 돌고 멀리 떨어질수록 늦게 돈다는 '면적속도일정의 법칙'이다. 그가 찾아낸 행성의 운동법칙 가운데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세 번째 법칙이다. 그는 행성이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과 태양까지의 거리에서 매우 특이한 유형을 발견했다. 즉 어떤 행성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를 세제곱한 다음, 그 숫자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의 제곱으로 나누면 항상 같은 숫자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은 태양 주위를 도는 모든 행성들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법칙이다.
그러나 케플러가 살던 당시의 유럽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혼란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구교인 가톨릭과 신교인 프로테스탄트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여러 왕조 사이의 적대 관계와 영토 분쟁은 30년 전쟁으로 이어졌다.
1618년부터 시작된 30년 전쟁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사이에 벌어진 최후의 종교전쟁이자 최초의 국제 전쟁이었다. 전쟁의 시작은 비록 종교의 갈등이었지만 각국의 영토와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동맹과 적대 관계를 반복하는 강대국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변질되었다.
유럽의 혼란은 케플러가 심은 과학의 새싹을 짓밟아 버렸다. 하지만 그 씨앗은 영국으로 옮겨져 활짝 꽃을 피웠다. 영국은 내전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뉴턴 같은 과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안정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도를 찾기 위한 노력
1707년 지브롤터해협에서 프랑스 함대와의 교전에서 승리를 거둔 영국 함대는 브르타뉴반도 앞바다의 외딴섬 근처를 통과하는 중이었다. 안개 속에서 북상하던 선원들은 영국 남서부 끝자락에 징검다리처럼 섬들이 흩어져 있는 실리제도 부근에서 경도를 잘못 계산한 것을 깨닫고 경악했다. 함대의 총사령관인 클로디슬리 경은 자신의 해군 경력을 통틀어 최악의 판단 착오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개 속을 헤매던 불과 몇 시간 전에 선원 한 명이 다급하게 그를 찾아와, 줄곧 자기 나름대로 위치를 계산해 보았다고 주장했다. 영국 해군은 병사들이 본분을 벗어나 항로를 따지는 일을 금지하고 있었으며, 이름 없는 선원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계산에 의하면 워낙 엄청난 위험이 닥칠 판국이어서 목숨을 걸고 장교들에게 알리려 했던 것이다. 계산의 옳고 그름을 떠나 사령관은 바로 그 자리에서 하극상의 죄목으로 선원을 교수형에 처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령관이 탄 함선은 암초에 충돌했고 4분 후 승선자 650명 전원이 함께 수장되었다. 뒤이어 다른 두 척의 배도 똑같은 운명을 맞이했고, 나머지 한 척은 약간 뒤늦게 가라앉았다. 불과 몇 분 사이에 네 척의 전함들이 차례로 암초를 들이받은 것이다. 2,000명 가까운 선원들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불과 스물여섯 명에 지나지 않았다.
영국 함대의 최후는 뱃사람들이 경도를 알 수 없었던 시기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들의 한 예에 불과하다. 경도를 모르는 탓에 항해는 더욱 길어졌고, 바다에서 보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선원들은 괴혈병이라는 무서운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경제적 손실 또한 엄청났다.
17세기 말에는 자메이카와의 교역에서만 연간 300척 가까운 배들이 영국과 서인도제도 사이를 오갔다. 화물선 중에서 단 한 척만 잃어도 그 손실은 어마어마했다. 따라서 상인들과 선원들은 어떻게 해서든 경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150년경 천문학자이며 지도 제작자인 프톨레마이오스는 스물일곱 장의 지도 위에 임의의 선들을 표시했다. 이때 그는 적도를 위도가 0인 선으로 잡았다. 적도는 임의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해서 적도를 정한 조상들의 선례를 따른 것이다. 적도에서는 태양과 달과 행성들이 거의 수직에 가깝게 머리 위를 지나간다. 역시 위도인 북회귀선과 남회귀선도 태양의 위치에 따라 정해졌다. 태양이 이 선들의 북쪽과 남쪽 경계선을 지나기 때문이다.
위도는 기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보통 적도에 가까워질수록 뜨거운 열풍이 분다. 기후라는 말이 원래 '지역 또는 지방'이라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우리가 날씨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온대'나 '열대'라는 단어들도 위도에 따른 지역의 구분이다.
경도는 본초자오선, 즉 경도가 0이라는 상상의 선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을 나눈 것이다. 적도에서 출발점을 갖는 위도와는 달리, 경도는 기준선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리스의 지리학자들은 저마다 다른 본초자오선을 사용했는데, 프톨레마이오스가 선택한 곳은 아프리카 서북쪽의 카나리아제도였다. 그 후 본초자오선은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 1884년 국제지리학회의에서 지금의 영국 런던으로 정해졌다.
유능한 뱃사람들은 낮의 길이, 태양의 높낮이, 그리고 잘 알려진 별을 보고 위도를 판단할 수 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대서양을 횡단할 때 직선 항로를 따라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그러나 경도를 측정하는 일은 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바다에서 경도를 알아내려면 배가 위치한 곳의 시각과 출발한 지점의 항구, 그리고 이미 경도를 알고 있는 한 곳의 시각을 동시에 알아야 한다. 이렇게 각각의 시각을 알면 그 시간 차이를 거리로 환산할 수 있다.
지구는 자전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면서 태양 둘레를 도는 거대한 시계라고 할 수 있다. 지구가 자전하면서 완전히 한 바퀴 도는 데는 24시간이 걸리므로 1시간은 1회전의 24분의 1, 즉 15도에 해당한다. 경도 15도라는 수치는 곧 배가 항해한 거리이기도 하다. 적도를 기준으로 지구의 둘레는 약 4만 킬로미터이므로 경도 15도의 차이는 1,600킬로미터의 거리에 해당한다. 그러나 적도로부터 남쪽이나 북쪽으로 갈수록 그 거리는 점점 짧아진다. 지구는 평면 위의 지도가 아니라 사과처럼 둥근 원이기 때문이다.
1714년 영국 의회는 경도법을 제정해 경도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에게 오늘날 화폐가치로 수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무려 2만 파운드의 상금을 내걸었다.
영국의 무명 시계공 존 해리슨도 이 문제를 탐구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리고 뉴턴조차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경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공했다. 무려 40년에 걸쳐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항상 정확한 시간을 유지하는 시계를 발명한 것이다. 그는 4차원의 시간을 2차원 공간인 시계에 압축시켜 지구의 각 지점을 하나로 연결시켰다.
경도를 찾는 과정에서 과학자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중요한 발견들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지구의 무게를 처음으로 계산한다거나 지구에서 별까지의 거리나 빛의 속도 등을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정확한 지도 제작이 대항해시대를 가능하게 만들다
각 대륙 사이의 무역과 항해는 고대로부터 끊임없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이어졌다. 그러나 15~17세기에 이루어진 유럽 의 대규모 지리적 발견은 비서구 지역의 식민지화라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대항해시대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으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그중 가장 대표적인 요인은 바로 안전한 항해를 가능하게 하는 지도의 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둥근 지구를 평면에 그리기 위한 수학적 지식이 요구되었다.
지도는 3차원 공간을 2차원 평면에 투영시킨 복잡한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실제 세계를 종이 위에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비례식으로 축소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우편엽서나 A4 용지 정도의 크기에 광활한 공간을 압축시키기 위해서는 '투영과 축척'이라는 수학적 기법이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10킬로미터의 실제 거리를 100만분의 1로 축소시키면 지도상의 1센티미터가 된다.
지도의 투영도법은 둥근 세상을 평평한 면 위에 재현하는 방법의 문제다. 사실 지도의 모든 투영도법은 왜곡되어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왜곡시키는가에 따라 크기가 달라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메르카토르 투영도법'은 극지방의 크기를 부풀림으로써 적도에 가까운 지역의 크기들을 거의 비슷한 비율로 나타낼 수 있다.
1569년 네덜란드의 메르카토르가 이러한 방식을 고안한 이유는 바다에서 직선항로를 찾기 위해서였다. 16세기 선원들이 바다를 항해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거리가 아니라 방향이었다. 즉 지도상의 거리보다는 나침반의 방위를 알려 주는 방향이 선원들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었다.
메르카토르는 정확한 방향을 유지하기 위해 격자눈금 시스템을 이용했다. 그러나 경도를 수직선으로 위도를 수평선으로 그리다 보니 모양이 왜곡되었다. 이런 왜곡 현상은 적도로부터 멀어질수록 심해진다. 극점 부근에서는 작은 지역들조차 넓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린란드는 아프리카 대륙과 비슷한 크기로 나타난다. 하지만 실제로 아프리카는 그린란드보다 15배나 크다. 마찬가지로 북아메리카는 아프리카보다 커 보이지만 아프리카의 면적은 북아메리카보다 1.5배 정도 더 크다.
1871년 제임스 갈이 만든 또 다른 투영도법은 전체 형태를 왜곡시키지만 땅덩어리의 크기는 보다 실제에 가깝게 표현된다. 그 외에도 짓눌린 오렌지 모양의 로빈슨 투영도법은 위도가 높아질수록 경도의 간격을 좁혀서 땅덩어리의 크기를 균일하게 나타낼 수 있다. 이렇듯 모든 지도는 면적의 크기와 위치, 방위 등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균형을 취하려 노력한 결과다.
지도 제작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정확한 비례 관계를 가진 격자 구조에 있다. 격자 구조의 그물망 속에 세상을 집어넣기 위해서는 정밀한 수학적 기법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도는 단순히 추상적인 기하학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도는 지질, 기후, 기상 같은 지구의 살아 있는 모습과 더불어 도로, 교통, 빈부 격차, 질병 등 생동감 넘치는 인간의 역사를 보여 주는 한 편의 훌륭한 드라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연세대학교에서 핵물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대덕연구단지의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다목적 연구용 원자로를 설계했다. 미국, 캐나다, 일본에서 입자가속기를 이용하여 핵자 및 소립자에 대한 ..펼쳐보기
연세대학교에서 핵물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대덕연구단지의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다목적 연구용 원자로를 설계했다. 미국, 캐나다, 일본에서 입자가속기를 이용하여 핵자 및 소립자에 대한 국제공동연구에 참여했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방사선종양학과에서 의학물리를 전공하고 방사선 진단 및 치료 장치와 핵의학 영상 장치들을 이용해 암환자들에 대한 3차원 입체조형치료를 시뮬레이션하는 연구를 했으며, 서울보건대학 방사선과 교수를 지냈다. 현재 과학 콘텐츠를 개발하고 연구하는 한국과학정보연구소장으로 일반인들을 위해 과학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주는 과학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연세대학교에서 핵물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대덕연구단지의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다목적 연구용 원자로를 설계했다. 미국, 캐나다, 일본에서 입자가속기를 이용하여 핵자 및 소립자에 대한 ..출처
수학자의 관점으로 다룬 인류 역사 이야기. 수학이 과학이나 기술 발전에 기여한 부분뿐만 아니라 철학, 문학, 미술, 음악, 전쟁과 어떻게 상호작용 했는지 통섭적인 시각..펼쳐보기
수학자의 관점으로 다룬 인류 역사 이야기. 수학이 과학이나 기술 발전에 기여한 부분뿐만 아니라 철학, 문학, 미술, 음악, 전쟁과 어떻게 상호작용 했는지 통섭적인 시각으로 설명한다.수학자의 관점으로 다룬 인류 역사 이야기. 수학이 과학이나 기술 발전에 기여한 부분뿐만 아니라 철학, 문학, 미술, 음악, 전쟁과 어떻게 상호작용 했는지 통섭적인 시각..전체목차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하늘과 땅의 지도 –세상을 움직이는 수학, 정갑수, 다른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